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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의 古典疏通] 人物論(37) 쓴소리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사마염 司馬炎] 아첨은 내치고 충언에 따라 행동하다.

이정랑 칼럼 | 기사입력 2020/11/27 [00:33]

[이정랑의 古典疏通] 人物論(37) 쓴소리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사마염 司馬炎] 아첨은 내치고 충언에 따라 행동하다.

이정랑 칼럼 | 입력 : 2020/11/27 [00:33]

쓴소리를 기꺼이 받아들인다...[사마염 司馬炎아첨은 내치고 충언에 따라 행동하다.

 

성인(聖人)도 칭찬과 아첨에는 약한 것이다. 

 

누구나 칭찬 듣기를 좋아한다. 심지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 말이다. 사탕 발림 같은 말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는 때와 장소가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첨과 눈가림은 봉건시대 관료사회의 영원한 법보(法寶)이다.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이 두 가지 법보는 신기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이 법보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남을 원망할 자격이 없다. 이와 관련된 의미심장한 얘기가 있다.

 

한번은 옥황상제가 어전회의를 열고 있을 때 관공(關公)이 칼을 차고 문을 지키고 있었다. 관공은 긴 수염을 휘날리면서 대단히 위엄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경외심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 그에게 다가가 절을 올리자 관 공이 물었다.

 

“그대는 누군가?”

 

낯선 사람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대답했다.

 

“소인은 아첨의 화신입니다.”

 

“무슨 일로 왔는가?”

 

“특별히 천상계의 신선들에게 아첨이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알아보러 왔지요.”

 

관공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천상계의 신선들은 인간들과 다르다. 네놈의 아첨이 통할 리 없을 테니 썩 물러가거라. 네놈이 나를 화나게 하지 않는다면 이 칼을 상으로 주마!”

 

아첨의 화신이 말했다.

 

“관공은 의로운 성인이시라 선계(仙界)에서나 범계(梵界)에서나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아첨이 통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모든 이들이 관공과 같아서 아첨이 통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관공께서는 범계에 계실 때 조조의 목숨을 놓아주신 적도 있는데 하물며 잠시 들여보내 주시는 것쯤이야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관공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들여 보내주었다. 잠시 후 아첨의 화신이 나오자 관공이 물었다.

 

“그래 누가 너의 아첨을 받아주더냐?”

 

“제 아첨을 받아주는 인물은 단 한 사람밖에 없더군요!”

 

관공은 기이하게 여기며 그게 누구인지 되물었다. 아첨의 화신이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바로 관공이십니다!”

 

관공은 화들짝 놀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 성인도 아첨에는 약한 법이다. 공자는 일찍이 ‘군자도 속임수에 당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이를 ‘군자도 아첨에 당할 수 있다’는 말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다면 인류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실제로 모든 제후 장상들이 아첨에 속는 것은 아니다. 일부 제후나 장상들은 아첨을 배척할 뿐 아니라, 이를 철저히 제거함으로써 청렴한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다. 진(晉)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이 바로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사마염은 서진 왕조의 초대 황제로, 그의 조부와 부친 대까지는 조조의 위(魏) 정권을 탈취하지 못하다가 그에 이르러서야 위를 대신하여 자립함으로써 70년간 지속했던 3국 분열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 사마염이 통치한 26년 동안 진 왕조의 가장 위대한 황제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직한 성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진 무제 태시(泰始) 8년(272), 사마염은 우장군 황보요(皇甫陶)와 정사를 논하고 있었다. 사마염은 평소 대신들과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일부 성격이 강직한 대신들이 너무 솔직한 말을 해서 무제를 노엽게 하는 일도 있었다. 특히 황보요는 성질이 급하고 솔직한 것으로 유명한 대신이었다. 그는 무제와 의견 차이를 보이자 무제의 말을 가로막고 자신의 주장을 역설했고, 무제도 이에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산기시랑 정휘(鄭徽)는 황보요가 마침내 황제의 미움을 샀다고 생각하고는 재빨리 표를 올려 황보요를 법대로 처단할 것을 요청하면서 황제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그러나 예상 밖에 무제 사마염은 정휘의 상소를 읽고 크게 화를 내며 대신들에게 말했다.

 

“솔직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은 짐이 신하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바요. 그래야만 여러 사람의 장점을 두루 살필 수 있기 때문이오. 짐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듣기 좋은 거짓말만 일삼는 사람들이오. 사탕발림으로 군주를 속이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을 것이오. 군주에게는 항상 아첨하고 칭송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환이 생기기 마련이지 정직한 쟁론을 펴는 대신들 때문에, 나라가 어지러워졌던 예는 없었소. 자신의 권한을 벗어난 정휘의 주장은 근거 없는 잘못된 지적으로 짐의 본의를 흐리려는 것이오!”

 

그리하여 정휘는 관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민주적인 감독과 검증의 장치가 없었던 봉건시대에 사마염이 보여준 자아 검증 정신과 아첨에 속지 않고 귀에 거슬리는 진언을 받아들일 줄 알았던 도량은 정말 귀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번은 무제가 남교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했다. 무제는 기분이 매우 좋아 대신 유의(劉毅)에게 말했다.

 

“그대는 짐을 한 대의 어느 왕에게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소?”

 

유의가 대답했다.

 

“소신의 견해로는 후한의 환제(桓帝)나 영제(靈帝)에 비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대경실색했다. 이 두 황제는 한 왕조에서 가장무도하고 무능했던 망국의 군주들로, 무제를 이들에게 비견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부당한 비유일 뿐, 아니라 죽음을 자초하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제는 화를 참으며 참을성 있게 말을 받았다.

 

”짐의 덕행이 비록 명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스스로 욕망을 억제하면서 정사를 잘 살피고 동오를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하지 않았소? 짐을 대표적인 혼군인 환제와 영제에 비견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것 같소!“

 

놀랍게도 유의는 조롱 섞인 투로 말을 계속했다.

”환제와 영제는 관직을 팔아 관고(官庫)를 채운 일이 있습니다만 폐하께서는 관직을 팔아 사고(私庫)를 채우셨지요. 이로 미루어 보건대, 폐하께서는 환제나 영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주위에 있던 대신들은 놀라다 못해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러나 오히려 진 무제는 흐뭇한 얼굴로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환제나 영제는 이처럼 날카로운 지적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짐에게는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짐의 과실을 말해주는 신하가 있으니 환제나 영제보다 못하진 않은 것 같소!“

 

이 대목에서 장손황후가 당 태종에게 올렸던 간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번은 태종이 궁정에서 위징의 솔직한 지적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위징이 사사건건 자신의 결점을 들춰내는데 크게 격분한 태종이 장손황후에게 말했다.

 

”내가 위징, 그 늙은이를 진작에 죽여버렸어야 하는 건데!“

 

장손황후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곧장 안으로 들어가 조복으로 갈아입고 나와서는 웃는 낯으로 태종에게 말했다.

 

”군주가 현명하면 신하가 정직한 법이라고 했습니다. 위징 같은 신하가 있다는 것은, 폐하께서 명군이심을 증명하는 일이지요!“

 

이 말을 들은 태종은 금세 화를 풀었고 위징에게는 화가 복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이 두 가지 사례를 비교해볼 때, 일찍이 유례가 없는 성군으로 평가되고 있는 당 태종도 사마염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태종은 지혜롭고 사리에 맞는 신하들 덕분에 정직한 간언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사마염은 주위 신하들의 종용이나 설득 없이도 너무 솔직하여 무례하기까지 한 간언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이는 봉건시대의 제왕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고귀하고 아름다운 아량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인성이 아무리 선하고 한 줄기 맑은 물 같다 해도 그것을 담는 물건에 따라 형체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외부적인 제도의 구속이 없다면 맑고 깨끗한 물도, 다 새어나가거나 구정물이 되어 고이기에 십상이다. 도덕의 힘은 불변하지만, 법제가 도덕적인 사회를 근원 없는 물이나 뿌리 없는 나무로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도덕의 힘을 맹신하는 것도 위험한 처사이다.

 

도덕은 내용이고, 민주주의와 법제는 형식이다. 이러한 내용과 형식이 조화롭게 결합 되어야만 선한 인성을 발휘하고 조장할 수 있다. 이른바 민주주의와 법제만 있고 도덕이 없다면 인간은 속이 빈 조개껍데기가 되고 말 것이다. 문제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도덕으로 민주주의와 법제를 대체한 시기가 너무 길었다는 데 있다. 이러한 범 도덕주의는 왕왕 군주의 권력 집중을 조장하여 부패와 부정을 유발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중국 역사에 그토록 많은 혼군과 폭군, 탐관오리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봉건 황제들은 ‘국가를 자신의 가정’으로 여기면서도 책임은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쉽게 타락했다. 권력만 있고 책임이 없는 민주적 감독 장치마저 없게 되면 인성의 약점이 무한히 팽창해 ‘식(食)’과 ‘색(色)’이라는 두 가지 본성만 남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다.

 

필자 : 이정랑 언론인. 중국고전 평론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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