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석 산행 칼럼] 산에서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다

김영석 칼럼 | 기사입력 2021/01/12 [00:05]

[김영석 산행 칼럼] 산에서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다

김영석 칼럼 | 입력 : 2021/01/12 [00:05]

 

▲ 이미 널리 소개된 블랙홀을 촬영한 가장 최근의 사진일 것이다. 2019년에 공개되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블랙홀의 일반적 성질은 '사건의 지평선'으로 불리우는 시간과 공간의 소멸이다. 어마어마한 질량으로 빛 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어 어떤 사건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알 수 없다. 사진출처: 이베트호라이존 망원경

산에 왜 오르는 걸까? 몇 년 전 나 자신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도대체 산에는 왜 그렇게 자주 오르는 걸까? 그 숱한 질문에 대한 마땅한 대답은 찾지 못했다. 아니 그 보다는  찾을 필요를 못 느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습관처럼 산에 오르다 보면 그저 일상의 한 부분으로 평소에 다니던 길을 걷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산에 오르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그냥 오르면 그만이지" 한동안 그렇게 지내다가 그 질문에 대한 막연한 대답을 우연하게 찾았다. 시간의 개념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해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불현듯 무릎을 내리치게 되었다. 

 

대체로 이러한 내용이었다.  

 

… 아인슈타인은 시간을 연구하다 상대성 이론에 대한 단서를 찾게된다. 그에게 시간과 공간은 물리학적 개념이었고 오래전부터 시간이란 그저 인간의 지성과 심리가 만들어낸 창작물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시간과 마차가지로 공간 역시 실존하지 않는 추상적 개념이라는 것을 상대성이론을 통해 규명하면서 현대 물리학의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요즘 과학이 주목하는 양자역학에 이르면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 라'는 방향성마저도 모호해진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편의상 만들어 놓은 추상적 개념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명제는 더욱 견고해진다.  우리는 ‘시공을 초월한다'는 말에 친숙하고 자주 사용하지만 실제로 그 개념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으로 단정해 버린다. 무협소설이나 무협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시공을 초월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중력에 가뿐히 이겨내고 공중을 날아다닌다. 축지법과 같은 순간이동 역시 시공을 초월하는 행위로 묘사된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이 알려주는 시공간의 개념은 상식과는  다르다.  시간을 넘나들고 공간에서의 이동을 자유자재로 할 필요가 없다.  물리학에서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두뇌에서 그리고 기억에서 없애버리고 지워버린다는 뜻이다. 시간은 환상일 뿐이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흐르지도 않는다. 내가 서있는 공간 역시 상상이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이다. 고통, 목적, 목표 등과 같은 심리학이 다루는 개념처럼 공간, 시간, 사건이라는 개념은 과학 이전의 사고에 속한다.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런 개념은 자연과학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시간과 공간에 익숙해진 탓에 물리학으로 정의된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과학자 조차도 개념은 개념으로 밖에는 인지하지 못할테니 내 무지를 탓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지 않는 허공에서 내가 아닌 나의 존재를 확인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이 오버랩된다. 우주 공간을 빠르게 이동하던 주인공 책장의 뒤편에 갇혀버리는데  5차원 공간과 3차원의 공간이 겹치는 곳에서 자신의 딸에게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공식을 가르쳐준다. 그때 사용한 도구가 중력과 시계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시계는 기묘하게도 앞뒤를 반복하는데 모르스 신호였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규정할 수 없다.    

 

산에 오르다보면 간혹 골짜기 하나가, 능선 한줄기가 온전히 나만의 공간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사방에 펼쳐진 풍경이 전혀 익숙하지 않은데도 마치 이전의 경험이 반복된 것처럼 느껴진다. 바람이라도 불지 않고 적막하다면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하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잠시 동안 시간을 인지하는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산속에서는 낮과 밤의 전환이 빠르다. 산에서는 계절의 변화 역시 빠르다. 더디게 보이지만 나무는 자라고 숲도 자란다. 변화가 뚜렷해 시간이 흐르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느낌이 이끄는 대로 산과 마주하면 시간은 사라진다. 산이 가져다주는 느낌에 솔직해진다면 시공을 초월하는 경험도 가능할 것이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산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도 있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변화하는 것을 시간이라 하지 말고 순환이라고 정의하면 어떨까... 나는 이 것을 돌고 도는 ‘인연의 순환’이라고 이름 붙이려 한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니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쉴새 없이 반복하지만 같은 모습, 같은 성질의 것은 아니다. 고로 이것은 순환이다. 시간과 공간은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가며 순환하는 운동의 거리와 양을 측정하는 단위로 쓰일 뿐이다.  

 

낙엽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흙이 되고 영양분으로 분해되어 수 십년, 수 백 년, 수 천 년 후에 다시 나무의 잎사귀로 태어나는 과정을 순환이라고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순환의 과정에서 소멸과 정지라는 개념은 적용되지 않는다. 굳이 무엇을 제한해야 한다면 그것은 탄생의 연속적 과정이 순환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는 것 역시 시간이 흘렀다고 말하지 말자. 시간으로 규정하면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으로 제한되고 왜곡되는 현상에 직면하게 된다.  

 

태고적 시절의 인류는 자연을 직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테니 시공의 개념도 시공을 초월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양자역학의 세계관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장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인간은 명상을 통해서야만 무한의 세계를 인지하게 되었다. 시간의 개념이 두뇌를 차지하고 몸과 마음을 통제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산에 오르는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부질없지만 산에서만 겪는 특이한 경험 탓에 산행은 언제나 기다림의 순서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오늘도  나에게 묻는다. “산을 왜 오르는지...?”  물리학적 상식이 더해진 나의 대답은 꽤나 심오하다. “산에가야 비로소 나를 지워버릴 수 있다.” 어차피 ‘나’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산이라는 대상 역시 허상이지 않은가. 실체 없는 내가 허상에 불과한 산을 대하니 ‘내가’ 사라지는 것이야 당연한 이치다.  산에서만 이런 생각에 젖어들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안타깝다. 관계가 꼬이고 복잡한 문제에 부딪히기 전에 홀연히 ‘나’를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아직도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미련이 많이 남아있기에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나마 산에 오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 본다.

 

<김영석:재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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