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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 「원기마을 이야기」 거창 덕유산 이경재 시인 별세

문홍주 | 기사입력 2021/03/02 [08:27]

[조의] 「원기마을 이야기」 거창 덕유산 이경재 시인 별세

문홍주 | 입력 : 2021/03/02 [08:27]

 

 

 

[국민뉴스=문홍주 기자] 문학평론가 염무웅 명예교수(前 영남대학교)는 SNS정보관계통신망 페이스북을 통해 1일 경남 거창 이경재 시인의 별세를 알렸다.

 

경남 거창 시인 이경재가 오늘 아침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이동순 시인이 알려왔다. 오래 못 만났지만, 나에게는 한 시절 그를 자주 만나 산에도 같이 가고 그곳 시민모임에도 참석했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1994년 봄 내가 다시 거처를 대구로 옮기고 나서부터인데, 그 무렵 정지창∙김창우∙이동순 교수들과 거의 주말마다 산행을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이경재는 형편이 어려워 새벽에 일어나 오토바이로 신문을 배달하고 낮이면 부인이 운영하는 전통찻집을 도왔다.

 

그래서 흔히 그는 산행 초입까지만 안내하고 일을 위해 돌아가는 수가 많았다. 그래도 그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젊은 나이에 벌써 당뇨가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요양에 전념해도 모지란데 새벽부터 밤중까지 일을 해야 하니, 병이 낫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늘 웃는 얼굴로 남을 도우려 했다.

 
  착한 사람 시인 이경재의 때이른 죽음을 애도한다.

 

다음은 창비 인터넷에 실린 이경재 시인 약력이다.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전주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MBC 창작동화 대상, 임수경 통일문학상(시), 청년 통일문학상(시)을 받았으며, 장편동화 『내가 살던 고향은』과 시집 『시방세』 『원기마을 이야기』를 냈다.

 

고향에서 15년 가까이 신문배달을 하면서 덕유산 주위의 많은 이야기들을 엮어 가고 있다. 송흥록, 송우룡, 송만갑 삼 대로 이어진 동편 판소리를 연구하다 소중한 명창들의 삶을 함께 나누고 싶어 이 책 『판소리와 놀자』를 썼다.

 

# 다음에 참고로 1997년 이경재 시집 『원기마을 이야기』 뒤에 붙인 나의 해설을 올린다.

 

              

공동체적 정서의 복원을 위하여

 
           ─ 이경재 시집 『원기마을 이야기』에 대하여          

 

 
  주말마다 서울과 대구를 오르내리는 생활을 6년쯤 하고 나니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다시 대구로 이사를 왔다. 그게 1994년 봄이었다.

 

그리고는 동료 몇 사람과 함께 정기적인 등산을 시작했다. 어쩌다가 설악산 공룡능선이나 지리산 천왕봉에도 올랐지만, 대체로 대구에서 한 두 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는 곳을 택한다.

 

팔공산 못지않게 우리가 자주 찾은 산은 운문산 ⦁ 가지산 ⦁ 재약산 ⦁ 문복산이다. 근자에는 경남 거창 쪽으로 자주 가는데, 남덕유산을 비롯하여 기백산ㆍ황석산ㆍ금원산ㆍ단지봉 등을 모두 몇 차례씩 올랐다.

 

거창 쪽으로 산행을 떠날 때면 우리는 늘 그곳의 젊은 시인 이경재를 만난다. 그가 운영하는 전통찻집에 들러 우선 한숨 돌리고 나서 산으로 떠나는 것이다.

 

그를 우리에게 처음 소개한 사람은 소설가 배평모씨였다. 그런데 배평모씨 자신은 겨우 두어 번 동행했을 뿐이고, 대신 이경재가 짬을 내어 산을 안내하거나 저녁 뒷풀이에 자리를 함께했다.

 

이렇게 어울리다 보니 우리 일행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이경재와 친해지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사귀면서 우리는 점점 그가 보통 젊은이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아주 편하게 하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란 누구나 제 나름의 개성이 있어서 그것이 매력이 되기도 하지만, 오래 지내다 보면 그 개성이 마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경재와 같이 있을 때는 누구나 마음이 놓이게 되어 저절로 자연스런 분위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경재는 실로 개방적이고 양보적인 인격의 소유자이다.

 

  그렇다면 이경재가 유복한 가정에서 구김살 없이 자랐기에 성격에 옹이가 박히지 않았나. 나는 그의 가정적 배경이라든가 성장과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단지 함께 걷는 동안 한 두 마디씩 주워들은 말과 특히 이번 시집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전부인데, 그것에 의하면 그는 오히려 매우 불우한 여건에서 자랐고 지금도 상당히 어려운 형편이다.

 

「도재 어머니」라는 시를 통해 나도 처음 안 사실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버리고 딴 살림을 차렸고,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부잣집 둘쨋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음에도 삼십 년이 넘도록 과부 아닌 과부가 되어 자식들을 키워야 했다. 「들성리 1」이라는 시에 묘사되어 있듯이 어린 시절 어쩌다가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집안에는 온통 세간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했고, 먼동이 틀 때까지 어머니의 울음이 이어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것이 어린 이경재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그 어렵던 시절을 그래도 다음과 같이 따뜻하게 추억하는 것이다.

 

 
   소요령 달아 딸랑하던 대문 멀리 

 
덕유산 지는 햇살 둥구나무 스며들면

 
   두레박 호박돌 가지런히 씻어놓고

 
   솔가지 밑불 돋아 삭다리 따스운 군불 놓던

 
   엄니, 형, 나랑

 
   소골소골 얘기하던 행복도 있었구나

 
                          ―「들성리 1」 부분

 

뿐만 아니라 그는 「재봉틀」 「어머니의 몸빼」 같은 시에 보이듯, 어머니에게 온갖 고생을 시켰고 어린 자기 형제들을 가난 속에 팽개친 아버지에 대해서조차 한마디 증오나 원망의 말이 없이 오히려,

 

 
   석양 붉게 묻어난 파장의 선술집

 
   막걸리 몇 잔 얼근하게 취하시던

 
   아버지 구수한 술주정도 만날 수 있을까?

 
                             ―「시골길」 부분

 

 
라고 그리움에 젖어 회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오늘의 현실에서 예외적인 정서에 속한다.

 

알다시피 오늘의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공동체는 파괴되고 가족은 해체의 위기를 맞고 있으며 개인들은 각자의 이익에 눈이 멀어 파편화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경재의 시집 전편에 깔려 있는 강인하고 질펀한 공동체적 정서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그것은 시인 이경재의 전근대적 낙후성을 증명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자본주의 경쟁체제의 비인간성에 대해 그가 완강하게 저항하는 것인가.

 

앞에서 그 일부를 인용했던 「시골길」이나 「위천장」 같은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이경재에게 있어 농촌공동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길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까

 
   아직도 비포장 읍내 가는 길

 
   젖 터져 내 젖 터져 소리치던 할머니

 
   결국 새우젓만 터져

 
   한바탕 웃음 자지러지던

 
   콩나물시루같이 빼곡한 장날의 완행버스

 
   이리 쓸리고 저리 쓸려도

 
   악을 쓰며 따라가던 장구경

 
   파김치 되어 돌아와도

 
   넉넉한 볼거리 피곤함도 잊었었네

 
                                     ─「시골길」 첫 연

 

 
  여기 묘사된 농촌의 모습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콩나물시루처럼 빼곡 들어찬 만원 버스가 표상하는 빈궁과 불편함이다. 

 

그것은 이 나라 농민들의 삶을 오랫동안 규정해온 객관적 조건으로서의 가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농촌은 그런 물질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그 빈곤에 찌들지 않는 해학과 여유의 장소이다.

 

예컨대, ‘젖 터져 내 젖 터져”라는 할머니의 고함소리는 만원 버스 안의 모든 불편과 짜증을 일시에 해소하고 그곳을 자지러진 웃음의 공간으로 역전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시가 그러한 농민적 해학과 농촌적 풍요를 언제나 과거시제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오늘의 시골에는 그러한 기쁨과 넉넉함이 사라졌다는 것이 이 시인의 현실인식이다. 작품 「위천장」에서 우리는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돌아오는 장날이면

 
   모동 강남불 상천 사람

 
   어나리 서마리 황산 남산동 사람

 
   멀리 덕유산 첫 자락

 
   황점 빙기실 소정 사람 죄다.

 
   끄덕끄덕 구루마 타고 모여들던 곳

 

 
   다리목 기름집 지나 삼거리 마늘전

 
   어물전 채소전 신전 옷전

 
   뭉실뭉실 김나던 국밥집 열무김치 막국수

 
   사돈에 팔촌까지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던

 
   왁자지껄 위천장 옛날 이야기였네

 

 
   외할머니 따라 장구경 가면

 
   아이구 불쌍한 우리 새끼

 
   다리 밑 어매 보러 나왔나

 
   눈깔사탕 몇 개쯤 공짜로 주던 곰보 아줌마

 
   동네사람 노놔 먹는 밥 한 술

 
   넉넉히 어린 시장기 덤으로 채우던 누룽지

 
   지금에사 미치도록 그리운

 
   왁자지껄 위천장 옛날 이야기였네

 
                                         ─「위천장」 전문

 

 
  거창에서 무주를 향해 조금 가다 보면 위천이 나온다. 거기 ‘수승대’란 이름의 절경이 있어 국민관광지로도 지정되어 있다.

 

황점과 빙기실은 덕유산 자락에 바짝 붙은 오지마을이다. 나는 등산을 위해 여러번 그곳을 지나갔거니와, 우리를 안내한 이경재에게는 그곳이 관광지거나 산행의 출발지가 아니라 유소년 시절 팍팍한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이경재에게도 위천장의 풍성함은 현존하는 현실이 아니라 과거의 추억 즉 ‘옛날 이야기’로 되었다. 우리가 늘 경험하듯이 대체로 시간은 사물을 미화한다.

 

그렇다면 이경재의 시들은 다만 미화된 과거의 영상에 매달려 있을 뿐인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이경재는 가정적으로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음에도 크게 상처받거나 불행의 자의식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과거와의 관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현재에 대해서도 그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다. 요컨대 그는 건강한 생명력의 시인이다.

 

물론 「신혼 단상」에 보이는 힘든 신혼살림, 「차를 달이며」 「참깨 밭에서」 「신문 배달」에 묘사된 고된 생계를 그가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는 ‘한겨레’를 비롯한 몇 개 신문의 거창지국을 운영한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신문을 받으러 간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신문 배달의 신체적 고달픔 속에서도 신체적 차원을 넘어서는 대지의 호흡 속에 자신을 풀어놓는다.

 

 
   봄이 어느새 왔는가 싶다

 
   오토바이 시동도 가벼워지고

 
   언 땅 흔들거림으로 빠져 나가던 골목길

 
   부드럽게 녹아 길 열어주고

 
   무거운 외투에 덮여

 
   무심코 지나치던 얼굴들

 
   이제는 살맛 난다고 인사를 한다

 
   누구보다도 먼저 봄이 왔음을 확인하는

 
   새벽배달 일꾼 웅크렸던 어깨가

 
   봄 허리 깊숙한 곳으로

 
   한결 가볍게 내달리고 있다.

 
                                       ─「봄마중」 전문

 

 
  참으로 소박한 작품이다. 현대사회의 복잡성과 현대시의 까다로움을 경험한 독자에게는 이 시의 단순한 감정세계는 거의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창군 시골길을 안 가는 데 없이 다니며 신문을 돌리던 이경재의 모습을 직접 보았던 나에게는 이 시의 생명예찬이 결코 위선적인 꾸밈으로 읽히지 않는다.

 

  이 시집에서 이경재가 가장 힘을 들였고 또 그런 만큼 상당한 서사시적 성취가 이루어진 것은 연작시 「원기마을 이야기」이다 모두 14편으로 이루어진 이 연작에는 강건한 정신과 체력을 지닌 세 젊은이가 새로운 농촌공동체를 건설해 가는 과정이 때로는 군가처럼 씩씩한 가락으로, 때로는 민요처럼 구성진 음률로 서술되어 있다. 나는 이경재를 따라 이 작품의 무대인 “삼봉산 아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사람 / 꾸역꾸역 바람 타고 넘는 곳”에 가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원기마을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인 새로운 시대의 건강한 농민들을 만나보기도 하였다.

 

거기에는 희망의 싹이 트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은 아직 허약하기 짝이 없는 가능성의 하나일 뿐이고, 자본주의 산업체제의 진정한 대안이 되자면 가야 할 길이 멀고 넘어야 할 산이 아득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안적 공동체의 역사적 복원이 오직 원기마을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힘든 실험의 형식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일까. 이것은 이경재의 시집이 저자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인 우리들 모두에게 숙제처럼 던진 질문이다.

 
                                    (1997년, 『원기마을 이야기』 해설 / 평론가 염무웅)

 

이 글을 올린 뒤 이경재 시인의 아들 이새힘 씨에게 계좌번호를 받았다. 부의를 표하실 분을 위해 아래 알린다. 예금주는 부인인 듯하다.

 

농협 8910. 2250. 384 신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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