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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 인물론(56) 法家는 人治 儒家는 治人...'동중서와 준불의' 경전(經典)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다.

이정랑 칼럼 | 기사입력 2021/04/08 [00:08]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 인물론(56) 法家는 人治 儒家는 治人...'동중서와 준불의' 경전(經典)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다.

이정랑 칼럼 | 입력 : 2021/04/08 [00:08]

法家人治 儒家治人...동중서와 준불의경전(經典)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다.

 

법가의 인치는 법에 따른 집행이고 유가는 법보다 예를 중시하다.

 

법으로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것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인류 전체가 추구해온 가장 기본적인 통치 형태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대 중국은 법가사상이 극도로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제가 완비된 국가를 실현하지 못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입이 바로 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법가의 법이 양성한 것은 인치(人治)의 인재들이었고, 유가가 배양한 것은 치인(治人)의 인재들이었다.

 

▲     ©김환태

() 양왕(襄王)이 중병으로 눕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신령을 찾아가 양왕이 빨리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나중에 양왕의 호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성들은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올리며 신령께 감사했다. 진의 낭중(郎中)이었던 염알(閻遏)과 공손연(公孫衍)은 백성들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서 몹시 놀라면서도 너무나 기쁜 나머지 서둘러 양왕에게 달려가 알렸다.

 

폐하, 백성들이 이토록 폐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보니 폐하의 덕행이 요순을 능가하는 것 같습니다.”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양왕은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그 지역의 지방관을 불러 백성들에게 벌을 내리라고 명했다. 염알과 공손연은 양왕의 태도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감히 그 이유를 따져 묻지 못했다. 나중에 양왕의 심기가 좋아졌을 때 백성들에게 벌을 내린 이유를 물었다.

 

백성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권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오. 내가 중병에 들었다고 백성들이 소를 잡아 기도를 올리는 것은 내가 이미 권력을 풀어놓고 백성들에게 인애(仁愛)를 펼치고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니, 이는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오. 따라서 짐은 그들을 처벌함으로써 애민의 도를 멀리하고 법과 권력의 위엄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오.”

 

원래 고대 중국의 법치 사상은 합리적이고 훌륭한 사회질서를 수립하여 백성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군주의 절대권력을 확립하여 백성들을 마음대로 부리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법가사상이 발달할수록 군주의 전제정치도 발달하게 되고, 결국 현대적 의미의 민주와 법제를 세우기가 어려워진다.

 

()나라는 전적으로 법령에 의지하여 나라를 다스리면서 백성들로 하여 관원들을 스승으로 여기게 했으며,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통해 지식과 문화를 말살하고 애민의 도리보다는 법과 권력의 위엄으로 통치한 결과, 왕조를 오래 지키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 극단적인 권력 집중은 합리적인 규약을 상실하게 되고 백성들의 침묵은 건전한 여론의 흐름을 고사시키며 여론이 없는 사회는 방향을 잃게 된다. 때문에, 지식과 자유가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상과 자유를 억압하는 이른바 법제가 진을 멸망케 한 것이었다.

 

유가의 법은 법가의 법처럼 노골적이진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한대에 성행했던 경의결옥(經義決獄)’은 그런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는 사건의 판결을 법률에, 의거하지 않고 경전의 기록과 상부의 지시에 따르는 것으로서 매우 의미심장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경의결옥이란 예의를 법률에 대입시키는 방법으로서 춘추를 비롯한 여러 경전의 기록과 논설을 기초로 각종 소송사건을 판결하는 것을 말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러한 방법은 동중서(董仲舒-전한 때의 유학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소송사건이 동중서의 손에 넘어오게 되었다. 갑이란 사람에겐 아들이 없었는데 우연이 길을 가다가 버려진 아이 을을 데려다 기르게 되었다. 을은 장성한 후에 살인을 저지르고 이를 갑에게 알렸다. 그러나 갑은 이 사실을 관원에게 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을을 숨겨주기까지 했다. 당시의 법률에 따르면 이는 연좌법에 해당하여 부자를 모두 사형에 처해야 했지만, 동중서는 사건의 진상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나서 이들을 옹호했다.

 

갑에게는 아들이 없어 을을 데려다가 양자로 키웠습니다. 비록 친아들은 아니지만 누가 그 아들을 빼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시경에도 배추 벌레에게 자식이 있었으나 양육하지 않으려 하자 과영(蜾贏)이란 곤충이 이를 대신 키워 자기 자식으로 삼은 일이 있었고, 춘추의 대의를 살펴보아도 아비가 자식의 과실을 감춰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황제는 동중서의 말을 듣고 즉시 갑에게 연좌법을 적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중서는 남편이 죽은 후에 재가한 여인의 사건도 이런 식으로 처리했다.

 

갑이란 여인의 남편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물에 빠져 죽었으나 시신을 찾지 못해 넉 달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장례를 치렀다. 나중에 갑의 모친이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재가시키자 갑의 전남편 집에서 그녀를 고소했다. 당시의 법률에 따르면 남편이 죽은 후 장례가 끝나기 전에는 재가할 수 없었고 이를 어길 경우, 기시(棄市-공개 장소에서 참수교수형을 집행하여,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고대 중국의 형벌)의 형벌을 받도록, 되었다. 이번에도 동중서는 춘추의 해석에 따랐다.

 

춘추에서는 제나라로 출가한 여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죽고 아들도 없어 다른 사람에게 재가했습니다. 부인은 스스로 행동을 결정할 권리가 없었고 그저 주위 어른들의 말에 따랐을 뿐이었지요. 모친이 그녀를 재가시킨 것은 음탕한 마음의 소치가 아니었고 스스로 남의 아내가 된 것이 아닌 만큼, 법률로 이를 처벌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입니다.”

 

결국, 이 사건도 동중서의 뜻대로 처리되었다. 이처럼 형사 사건이건 민사 사건이건 간에 한대에는 춘추라는 경전에 근거하여 사건을 처리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한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한 남자가 미앙궁 북쪽 궁궐에 찾아와 자신이 위나라 태자 유거(劉據)라고 주장하는 해괴한 일이 있었다. 유거는 정화(征和) 2년에 모반죄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에 빠져 도망쳤다가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보정대장군(輔政大將軍) 곽광(霍光)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며 대신들을 북궐에 모아놓고 위 태자의 용모와 언행을 되새기며 진위를 가리기 위해 골몰했다. 모두 증명할 방법이 없어 고심하고 있을 때 경조윤(京兆尹-한나라 때 수도를 지키고, 다스리던 관직) 준불의(雋不疑)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는 진위를 따지기도 전에 곧장 관원들에게 그를 잡아 가두라고 명령했다. 혹시 그가 진짜 위 태자일 경우 후환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한 사람들은 진위가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잡아 가두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준불의가 말했다.

 

그가 진짜 위 태자라고 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소. 춘추전국시대에 위 공자 괴외는 위 영공(靈公)에게 죄를 짓고 진나라로 도망쳤소. 영공이 죽은 후에 괴외의 아들 추가 왕위를 계승하자 괴외는 다시 위나라로 돌아가려 했으나 추가 돌아오지 못하게 했고, 춘추에서는 이 일을 잘못이라 하지 않았소. 당시에도 아들이 군주가 되어 부친을 돌아오지 못하게 했는데, 하물며 지금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소?”

 

이 말에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곽광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공경대부들이라면 경전에 통달해야 할 것 같소!”

법률을 공부하는 것이 실제로 경전이나 정책에 통달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과 법()이 하나로 일치해야만 인사에 통달할 수 있는 것이다. 우스운 것은 경전이 형벌의 가부를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해몽에도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옛날에 한 서생이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서생은 자신이 제일 먼저 시험장에 들어서는 꿈을 꾸고는 흥분을 금치 못하며 아내에게 꿈 얘기를 했다.

 

이는 틀림없이 내가 일등으로 급제할 것을 예시하는 꿈이오!”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아니에요! 논어에 선진제십일(先進第十一)’이라고 기록된 것도 잊으셨나요?”

 

나중에 서생이 과거에 합격하여 자신의 성적을 확인해보니 과연 11등이었다. 이처럼 경서는 법률을 대신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잠재의식에도 파고들어 경전에 대한 중국인들의 의존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법률이 인정에 얽매인다면 어떻게 진정한 집행이 가능하겠는가?

 

필자 : 이정랑 언론인. 중국고전 평론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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