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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한국 전 군부 독재자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국민적 초상참시 당하는 광주학살 주범 전두환

김환태 | 기사입력 2021/11/25 [06:03]

뉴욕타임스, 한국 전 군부 독재자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국민적 초상참시 당하는 광주학살 주범 전두환

김환태 | 입력 : 2021/11/25 [06:03]

광주학살 군부독재자 전두환 사망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가 보위에 헌신해야할 군인의길을 출세와 권력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이용한 전형적인 정치군인으로 12.12군사반란을 주도한데 이어 5.18광주 민주항쟁을 무력으로 유혈 진압, 수많은 인명을 학살하고 정권을 강탈 11~12대 대통령으로 권세를 누린 군사독재자 전두환( 1931년 1월 18일~2021년 11월 23일)이 23일 오전  8시 45분경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져 향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전두환은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나 5세에 대구로 이주하였으며 육균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전방 야전군 장교 시절을 거쳐 대위때 육사생도 박정희 5.16군사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한 공로로 5.16 직후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한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장교시절 정치군인의 힘의 원천이 되었던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와 군내 기수별 친목모임인 하나회에 참여해오다 1976년 3월 차지철,박종규 등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발탁되면서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되고, 김재규 10.26 사태 후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박정희 저격 사건 수사를 권력찬탈의 결정적 기회로 삼아 1979년 12월 12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김재규 협력자라는 혐의로 체포한 12.12 군사반란을일으켜 실권을 장악하였다.

 

1980년 3월에는 최규하,신현확을 협박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겸직하였으며 5.17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서울의 봄 대학생들의 민주화시위를 진압하고 김대중,김영삼,김종필 3김을 구속,가택 연금시키고 이로인해 촉발된 광주 민주항쟁을 공수여단과 제 20기계화사단 등 무장 군사력을 광주에 투입,무장 항쟁에 나선 시민군과 광주시민을 무력으로 유혈 진압한후 정권 강탈 수순에 들어갔다.

 

전두환은 5월 27일 국보위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어 정부의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후 허수아비 최규하 대통령을 쫒아낸후 1980년 9월 1일 장충체육관에서의 간선제를 통해 스스로 제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가 6개월후인 1981년 3월 3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통해 7년 임기 제 12대 대통령에 취임,7년 6개월동안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하였다.

 

수구 보수세력들은 전두환이 국가경제를 살린 업적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후광을 것일뿐 실질적인 경제적 치적은 허울에 불과할 뿐이다.

 

 전두환은 보안사와 안기부를 권력 친위대 삼아 언론통페합,전시효과노린 삼청교육대,박종철 열사 고문 치사 등 민주화 탄압,기업을 협박 1조원 넘는 정치자금 강탈, 5000억원~1조원대의 육해공 국방예산 상납 착복 등 권력형 부정부패,초법적 강권통치로 국정을 농단한 반민주 반헌법적 독재자였다.

 

특히 전두환은 목숨이 끊어지기전까지도 광주민주항쟁 유혈진압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광주시민에 대해 사죄와 반성도 하지 않은 금수만도 못한 야만적 행태로 일관하여 죽음을 맞아서도 국민적 초상참시를 당하고 있다.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육군중위였던 필자는 신군부가 유혈진압한 후 사령부에서 개최된 '유언비어 군 유입 차단 및 군동요방지 고도의 전투력 유지' 세미나에서 신군부의 광주 민주항쟁 무력진압을 강력 공개 비판하고 이어 대위 진급후 정보사령부 근무 당시 당시 대통령 전두환을 광주시민을 학살한 범죄자로 처단해야 한다는 장문의 글을 쓴게 발각되어 3개월만에 보직 해임되어 정보사령부에서 강제 전출 당하는 등 곤욕을 겪은 당사자로서 사죄없이 이승을 떠난 전두환의 죽음에 분노의 심정을 가눌 수 없다.

 

국민학살 독재자 전두환의 사망에 대해 세계 각국 언론들도 비판적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의 경우  ‘한국 전 군부 독재자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Chun Doo-hwan, Ex-Military Dictator in South Korea, Dies at 90)’으로된 제목으로 전두환의 사망을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전두환이 ▲박정희 때 쿠데타 참여로 입지 굳혔으며 ▲ 언론 탄압, 광주 학살, 삼청 교육대 등을 들어 32년 군부 정권 중 가장 비난받는 지도자라면서 ▲ 전 미 대사의 말을 인용, 한국인에 반미 감정 부추긴 점 ▲ 광주 학살 끝내 사과 없고 추징금도 미납한 사실을 집중 시켰다.

 

뉴욕타임스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아 1980년대를 철권 통치한 전 군부 독재자가 사망했다고 말하면서, 그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군부 독재자이며 군대의 장군이었다가 대통령이 된 세 명의 한국 대통령 가운데 가장 최근에 사망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또, 내란 선동과 군사 반란죄로 1996년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1997년 그의 정적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해 당선 직후 화해의 표시로 사면을 받았다고 언급하고 뿐만 아니라 그는 1979년부터 10여 년 간 한국을 통치하면서 대기업에 세금 면제 등 수많은 특혜를 안겨 준 대가로 수억 달러를 뇌물로 받아 유죄를 선고 받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전두환이 1961년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에도 참여했으며 그로써 군부 엘리트 내에서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박정희의 암살 직후 그는 통치권을 강탈하기 위해 직접 쿠테타를 일으켰다고 했다. 전두환은 지난 10월 사망한 전직 친구이자 장군이었던 노태우 씨를 후계자로 지목했고 그로 인해 32년간 장군들이 통치한 한국은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아시아의 호랑이라는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로 부상해 라이벌인 북한을 앞서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뉴욕타임스는 더 나아가 전 씨의 재임기간 동안 업적으로 한국의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연 평균 10%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며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국가들 중 하나가 되었으며 또, 88올림픽 유치로 국제사회에 성공적으로 데뷔하는 한편, 숙적인 일본과의 격차를 크게 뛰어넘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씨는 독재자로 기억된다고 기사는 말하면서, 긍정적인 성과보다 권력을 잡았던 불법적 방법과 임기 내내 지속되었던 독재적 성향 등 부정적인 성과가 더 크다는 대통령 리더십 연구원 최 진 원장의 말을 인용했다. 이어 전 씨의 가계와 생애에 대해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전 씨가 겪은 일들 중 부모에 관한 일화와 가난, 학창시절 등을 언급하였다.

 

쿠테타를 일으킨 1979년, 전 씨는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근무 중이었고 군 내부의 장군 친구들은 동향 출신으로서 당시 자신들의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뒤 부대를 서울로 이동시켜 무난히 쿠테타를 완수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정승화 사령관은 이 쿠테타에 대해 전두환의 개인적인 탐욕만을 위한 더러운 반란이라고 말하면서, 거짓 자백을 이끌어내려는 그들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고 밝혔음을 전했다.

 

쿠테타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의회와 대학을 폐쇄했으며, 핵심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을 포함해 잘 알려진 반체제 인사들을 구금했으며 이후 1980년 5월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봉기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으며 곤봉과 총검이 동원된 무자비한 폭력이 행해졌는데 이때 희생당한 사람들의 숫자는 공식적인 집계로 191명이며 유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희생자는 훨씬 더 많다고 언급했다.

 

이후 전 씨의 군부 정권은 북한의 명령으로 광주 소요를 선동했다는 거짓 혐의를 씌워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한국에 근무한 바 있는 전 미국 외교관 스트라우브는 자신의 저서에서 전씨가 광기 어린 폭정으로 한국 청년층의 사고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반미 정서를 불러 일으켰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은 자국의 군대가 미국의 작전 통제 하에 있음에도 미국 정부가 광주 학살을 막지 못한 것은 배신의 증거라고 생각했다며, 훗날 전두환의 인권 침해에 대해 레이건 대통령이 침묵의 외교를 펼친 사실도 미국 정부가 전두환 정권 하에서 겪는 한국인들의 고통을 무시했다는 신념을 강하게 해주었다고 덧붙였다.

 

이 일로 한국 청년들의 반미 주의는 수십 년 동안 격렬하게 타올랐으며 미국 외교 시설물을 급습해 방화하는 등의 사건으로 이어졌고 미군 기지들은 양키 고홈 같은 시위자들의 외침에 시달렸으며 이에 대해 미국 정부는 전두환의 쿠데타에 오히려 허를 찔렸고 당시 광주에 배치된 어떤 군대도 미군의 통제 하에 있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전두환의 계엄령을 비난하고 광주에서 자제하기를 요청했지만 정부에 의해 통제된 한국 언론은 미국이 광주에 전두환의 군대 배치를 승인했다는 보도를 내놨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스트라우브는 전두환이 한국 국민뿐만 아니라 미국까지도 조종했다고 말했다.

 

기사는 전두환이 2016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광주에 발포 사격 명령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면서, 전두환은 자신을 정치보복의 희생자라고 말하고 자신은 광주 학살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군인으로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조국에서 다른 길이 없었기에 자신이 되어야 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전두환의 언론 탄압을 언급하며 광주 학살 후 전두환은 친 정부 대의원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직 대통령이 된 후 강제로 언론 폐간과 합병은 물론, 매일 언론지침으로 신문과 방송국을 통제했다고 전했다. 또 황금 시간대의 TV뉴스는 항상 전두환의 일상으로 점철되었으며 방송인들은 전두환과 닮은 대머리라는 이유로 TV에서 퇴출되기도 했다는 점을 들었다.

 

이어, 반정부 인사들과 학생 운동가들, 언론인들이 고문실로 끌려 갔으며 전두환의 사회 정화 프로그램에 의해 수십만의 폭력배, 노숙자, 반정부 인사들과 사회에 불건전한 요소들로 여겨졌던 그 외의 사람들을 체포해 잔인할 정도의 재건 프로그램을 받도록 했으며 그로 인해 수백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고 밝혔다.

 

기사는 그가 1983년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할 때, 북한은 그를 암살하려 했다고 말한다. 북한 요원에 의해 설치된 폭탄이 당시 버마 수도인 랑곤(현 양곤)에 있는 순교자의 묘를 파괴했고 한국의 주요 인사들이 21명이나 사망했다면서 전두환은 도착이 늦어지는 바람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또 전두환이 자신이 고른 후임자 노태우가 자신과 같은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기를 원했으나 고문 당한 한 학생 운동가(박종철)의 죽음으로 촉발된 대규모 시위로 전두환과 노태우는 보통 선거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노태우는 16년 만에 한국의 첫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는 군부 통치에 대한 증오만큼이나 상호 불신이 깊었던 두 야당 인사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 간의 표가 갈린 것이 큰 이유였다고 기사는 밝히고 있다.

 

이후 전두환이 백담사 유배로 처벌을 요구하는 일반 대중을 진정시키려 했다고 말하면서 김영삼이 집권한 후 전두환과 노태우 등 전직 장군을 잡아들였는데 1997년 대법원 판결에서 전두환은 뇌물로 불법 축적한 2200억을 국가에 반납하라는 선고를 받았으나 그는 벌금을 낼 돈이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전두환이 친인척들의 관리 하에 재산을 숨겨왔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검찰은 압수를 위해 집을 급습했지만 냉장고 한대와 개 두 마리뿐이었고 벌금은 지금까지 총액의 절반 밖에 징수하지 못했다고 기사는 강조했다.

 

다음은 뉴스프로가 번역한 뉴욕타임스의 기 전문이다.

 

Chun Doo-hwan, Ex-Military Dictator in South Korea, Dies at 90

한국 전 군부 독재자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

The country’s most vilified former military dictator, he seized power in a coup and ruled his country with an iron fist for most of the 1980s.

한국에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전 군부 독재자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고 1980년대의 대부분을 철권으로 통치했다.

 

▲ Unapologetic to the end, Chun Doo-hwan was the last to die among South Korea’s three military general-turned presidents. Credit…Yun Jai-Hyoung/Associated Press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던 전두환은 군의 장군이었다가 대통령이 되었던 세 명의 한국 대통령 중 가장 최근에 사망한 자이다.

 

 By Choe Sang-Hun Nov. 22, 2021

 

Chun Doo-hwan, South Korea’s most vilified former military dictator, who seized power in a coup and ruled his country with an iron fist for most of the 1980s, dispatching paratroopers and armored vehicles to mow down hundreds of pro-democracy protesters, died on Tuesday at his home in Seoul. He was 90.쿠데타로 권력을 잡아 1980년대의 대부분을 철권통치 했으며, 낙하산부대와 장갑차를 동원하여 수 많은 민주화 시위자들을 살육했던,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아온 한국의 전 군부 독재자 전두환이 23일 화요일 서울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90세였다.

His death was confirmed by South Korea’s national police agency. 한국 경찰청에서 그의 사망을 확인했다.

 

In 1996, eight years after he left office, Mr. Chun was sentenced to death on sedition and mutiny charges stemming from his role in the 1979 coup that brought him to power and the massacre of demonstrators at the southwestern city of Gwangju the following year. 퇴임한지 8년 후인 1996년, 전 씨는 자신에게 권력을 안겨준 1979년의 쿠데타를 일으키고 다음 해 남서부 지역에 있는 도시인 광주의 시위자들을 대량 학살한 데에 대해 내란선동과 군사반란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But he was pardoned in 1997 in a gesture of reconciliation, shortly after Kim Dae-jung, a former dissident whom Mr. Chun’s military junta had once condemned to death, was elected president. 하지만 1997년 한때 전두환의 군사정권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던 반정부 인사,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화해의 표시로 사면을 받았다.

 

Mr. Chun, who ruled his country from 1979 until early 1988, was also convicted of collecting hundreds of millions of dollars in bribes from wealthy, politically connected families known as chaebol whose businesses expanded into conglomerates with the help of tax cuts and other government favors. 1979년부터 1988년 초까지 한국을 통치했던 전 씨는 세금 면제와 그 외 정부의 특혜 덕택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대기업이 된 부유하고 정치적 관련성이 있는 가문, 이른 바 재벌들로부터 수억 달러를 뇌물로 받은 것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Unapologetic to the end, Mr. Chun was the last to die among South Korea’s three military general-turned presidents.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던 전 씨는 군부의 장군이었다가 대통령이 되었던 세 명의 한국 대통령 중 가장 최근에 사망한 자이다.

 

As an army captain, Mr. Chun took part in Maj. Gen. Park Chung-hee’s coup in 1961, a move that secured his place in Mr. Park’s military elite. 군 지휘관으로서 전 씨는 1961년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에도 참여했으며, 이는 박정희의 군부 엘리트 내에서 그의 위치를 확고하게 한 행동이었다.

 

When Mr. Park’s 18-year dictatorship abruptly ended with his assassination in 1979, Mr. Chun, by then a major general himself, staged his own coup to usurp control. 1979년 박정희의 18년 간의 독재가 암살로 갑자기 끝나버리자, 당시 소장이었던 전 씨는 통치권을 강탈하기 위해 직접 쿠데타를 일으켰다.

 

He later handpicked his friend Roh Tae-woo, also a former general, as successor. Mr. Roh, president from 1988 to 1993, died in October. 이후 그는 친구이자 전직 장군이기도 했던 노태우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1988년 부터 1993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노 씨는 지난 10월에 사망했다.

 

During the three generals’ combined rule of 32 years, South Korea rose from the ruins of the 1950-53 Korean War to become one of Asia’s Tiger economies, overtaking rival North Korea in industrial output and national income. 모두 합쳐 32년이었던 세 장군의 통치기간 동안, 한국은 1950년-53년의 한국전쟁으로 인한 폐허에서 아시아의 호랑이라는 위상의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로 부상하며 라이벌인 북한을 산업 생산량과 국민소득에서 앞서게 되었다.

 

While Mr. Chun was in office, South Korea tamed its chronic inflation, and its economy was among the world’s fastest growing, expanding an average 10 percent a year. 전 씨의 재임 기간 동안 한국은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억제했고, 한국 경제는 연 평균 10% 성장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들 중 하나가 되었다.

 

His government also overcame huge odds against Japan, its historical enemy, to win the right to host to the 1988 Olympics, widely seen as a coming-out party for the once war-torn nation. 그의 정권은, 한때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국가의 국제사회 데뷔 파티로 보였던 1988년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며 숙적인 일본과의 큰 격차를 뛰어넘기도 했다. But Mr. Chun is mostly remembered as a dictator. 하지만 전 씨는 대체로 독재자로 기억된다.

 

“Among South Koreans, his name is synonymous with a tyrannical military dictator,” said Choi Jin, director of the Institute for Presidential Leadership in Seoul. “His positive achievements are far outweighed by his negative legacies — the illegitimate way he came to power and the dictatorial streak that ran through his term.” 서울에 있는 대통령 리더십 연구원의 최진 원장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은 폭력적인 군사 독재자와 동의어이다”라며 “그의 긍정적인 성과 보다 그가 권력을 잡았던 불법적인 방법과 그의 임기 내내 지속되었던 독재적인 성향 등의 부정적인 유산이 더 크다”라고 말했다.

 

Mr. Chun was born on Jan. 18, 1931, to a farming family in Hapcheon in what is now southern South Korea. At the time, Korea was a colony of Japan’s. 전 씨는 1931년 1월 18일 한국의 남부 지방인 합천에서 농작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While his father, Chun Sang-woo, ran from debt-collectors and Japanese police officers (after pushing one of them off a cliff), his mother, Kim Jeom-mun, had high expectations for Doo-hwan, one of their four sons. 그의 부친 전상우 씨는 빚 수금 대행업자와 일본 경찰로부터 도망쳤고(경찰 중 한 명을 절벽에서 밀어버린 후), 모친인 김점문 씨는 네 명의 아들 중 하나인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컸다.

 

When a Buddhist fortuneteller predicted that her three protruding frontal teeth would block the boy’s path to future glory, she rushed into her kitchen and yanked them out with a pair of tongs, according to “Chun Doo-hwan: Man of Destiny,” an authorized biography published after his coup. 그의 쿠데타 이후 정식으로 발간된 자서전 “전두환: 운명의 남자”에 따르면, 점쟁이가 전두환 모친의 돌출된 앞니 세 개가 아들의 장래 성공을 향한 길을 가로 막을 것이라고 예언했을 때, 그녀는 급하게 부엌으로 가 집게로 이를 뽑아버렸다고 한다.

 

After finishing vocational high school, Doo-hwan gave up going to college because he could not pay tuition.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전두환은 등록금을 낼 수 없어서 대학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Instead, he joined the Korea Military Academy, where he practiced boxing and captained its soccer team as a goalie. (As president, he used to call the head coach of South Korea’s national soccer team in the middle of a match to dictate game strategy.) 대신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복싱을 연습하고 골키퍼로서 축구 팀의 주장을 맡았다.(대통령으로서 그는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수석코치를 경기 중에 불러서 경기 전략을 지시하곤 했다.)

 

General Chun was serving as head of the military’s intelligence command in late 1979 when Mr. Park was assassinated by the director of K.C.I.A., his spy agency, during a drinking party. 전두환은 1979년 후반 박 전 대통령이 음주 향연 중 첩보기관인 한국 중앙정보부 부장에 의해 암살되었던 당시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근무중이었다.

 

Mr. Chun and his army friends — mostly officers like Mr. Roh who hailed from his home province in the southeast of South Korea — arrested their boss and martial-law commander, the army chief of staff, Gen. Jeong Seung-hwa, and moved their troops into Seoul to complete his largely bloodless coup. 전씨와 그의 군 내부 친구들은 — 대부분 노태우처럼 그의 고향인 한국의 동남지역 출신인 장교들 — 자신들의 상관이자 계엄사령관이며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 사령관을 체포하고 자신들의 부대를 서울로 이동시켜 전반적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쿠데타를 완료했다.

 

“It was a dirty rebellion that served no other purpose than to satisfy Chun Doo-hwan’s personal greed,” General Jeong said later. He said Mr. Chun’s cronies had flogged and waterboarded him to extract a false confession that he had been complicit in Mr. Park’s assassination. 정승화 사련관은 후에 “전두환의 개인적인 탐욕만을 충족시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는 더러운 반란이었다”라고 밝혔다. 정 사령관은 전 씨의 측근들이 자신이 박 전 대통령의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거짓 자백을 끌어내기 위해 매질을 하고 물고문을 했다고 말했다.

 

Mr. Chun placed the country under a martial law, closing Parliament and universities and detaining prominent dissidents, including the two main opposition leaders, Kim Young-sam and Kim Dae-jung. In May 1980, people in Gwangju, Kim Dae-jung’s political home base, rose up in protest, chanting, “Down with Chun Doo-hwan!”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의회와 대학을 폐쇄했고 두 명의 핵심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을 포함한 잘 알려진 반체제 인사들을 구금했다. 1980년 5월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봉기했다.

 

Troops moved in, wielding batons and bayonets and opening fire. Some protesters armed themselves with weapons stolen from police stations. The crackdown cost at least 191 lives by official count, including 26 soldiers and police officers. Victims’ families said the death toll was much higher. 군인들이 진입했으며 곤봉과 몽둥이와 총검을 휘두르고 사격을 시작했다. 일부 시위자들은 경찰서에서 훔친 무기들로 스스로 무장을 했다. 공식적인 집계에 의하면, 그 진압으로 26명의 군인과 경찰관을 포함 최소 191명이 희생되었다. 희생자들의 유족은 사망자 수는 훨씬 더 많았다고 말했다.

 

Mr. Chun’s military junta later sentenced Kim Dae-jung to death on a false charge of instigating the Gwangju uprising at the behest of North Korea. 후에 전두환의 군부 정권은 북한의 명령으로 광주 소요를 선동했다는 거짓 혐의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The incident was an outrage and a tragedy that was to profoundly shape the thinking of an entire generation of young people in Korea, making many of them extremely critical of the United States,” David Straub, a former American diplomat who served in South Korea at the time, wrote in his 2015 book “Anti-Americanism in Democratizing South Korea.” 당시 한국에서 근무했던 전 미국 외교관 데이비드 스트라우브는 2015년 자신의 저서 “민주화하는 한국에서의 반미주의”에서 “그 사건은 광기어린 폭정과 비극 그 자체였고 당시 한국 청년층의 사고에 깊은 영향을 주어 그 중 많은 이들에게 극한 반미정서를 불어일으켰다.”라고 했다

 

To young Koreans, Washington’s perceived failure to stop the Gwangju massacre despite the fact that their country had placed its military under the operational control of American generals was evidence of betrayal. Later, President Ronald Reagan’s “quiet diplomacy” toward Mr. Chun’s human rights abuses hardened their belief that Washington had ignored Koreans’ suffering under Mr. Chun. 한국의 젊은이들이 보기에, 자국의 군대가 미군 장성들의 작전 통제권하에 있음에도 미국 정부가 광주 학살을 막지 못한 것은 배신의 증거였다. 훗날 전두환의 인권 침해에 대해 로널드 레이건이 “침묵의 외교”를 한 사실도 미국 정부가 전두환 정권하에서 겪는 한국인들의 고통을 무시했다는 신념을 더욱 강하게 했다.

 

Anti-Americanism among young South Koreans raged into later decades. Student activists raided U.S. diplomatic facilities, setting one on fire. American military bases were plagued by demonstrators shouting, “Yankee, go Home!” 젊은 한국 청년들의 반미주의는 이후 수 십 년 동안 격렬했다. 학생 운동가들은 미국 외교 시설물을 급습해 한 곳에 불을 질렀다. 미군 기지들은 “양키, 고홈!”과 같은 시위자들의 외침에 시달렸다.

 

Washington said that it had been caught off-guard by Mr. Chun’s coup and that none of the forces deployed at Gwangju were at the time under the control of any American authorities. It criticized Mr. Chun’s martial law and called for restraint in Gwangju, but the government-controlled South Korean news media reported that the United States had approved Mr. Chun’s dispatch of troops there. 미국 정부는 전두환의 쿠데타에 허를 찔렸고 당시 광주에 배치된 어떤 군대도 미군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은 전두환의 계엄령을 비난했고 광주에서 자제하기를 요청했지만, 정부에 의해 통제된 한국 언론은 미국이 광주에 전두환의 군대 배치를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Mr. Chun “manipulated not only the Korean public, but also the United States,” Mr. Straub wrote. 스트라우브는 전두환이 “한국 국민 뿐만 아니라 미국까지도 조종했다”라고 말했다. In a rare interview published in the South Korean monthly magazine Shindonga in 2016, Mr. Chun denied giving a shoot-to-kill order in Gwangju. He called himself a victim of political “revenge.” 2016년 한국의 월간지 신동아에 기재된 인터뷰에서 전두환은 광주에서의 발포 사격명령을 부인했다. 전두환은 자신을 정치적 “보복”의 희생자라고 말했다.

 

“I had nothing to do with the Gwangju incident,” he told the magazine. “As a soldier, I saw the country in a difficult situation, and I had to become president because there was no other way. It was not like I wanted to become president.” 전두환은 신동아에서 “나는 광주 사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말하며, “군인으로서, 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조국을 보았고, 다른 길이 없었기에 대통령이 되어야 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라고 했다.

 

After the Gwangju massacre, Mr. Chun had himself elected president by an electoral college filled with pro-government delegates. He forced the country’s news media to shut down or merge into a handful of newspapers and TV stations, which his government controlled with a daily “press guideline.” Prime-time TV news always began with reports on Mr. Chun’s daily routine. A comedian was banished from TV when people began comparing him to Mr. Chun; both were bald. 광주 학살 후, 전두환은 친정부 대의원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직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은 강제로 한국의 언론을 폐간하거나 소수의 신문과 TV 방송국으로 병합했으며, 매일 “언론지침”으로 신문과 방송국을 통제했다. 황금시간대의 TV 뉴스는 항상 전두환의 일상을 보도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한 코미디언은 사람들이 둘 다 대머리라는 이유로 그를 전두환과 비유하기 시작하자 TV에서 퇴출되었다.

 

Dissidents, student activists and journalists were hauled into torture chambers. Under Mr. Chun’s “social purification” program, the government rounded up tens of thousands of gangsters, homeless people, political dissidents and others deemed to be unhealthy elements of the society and trucked them to military barracks for brutal re-education. Hundreds were reported to have died under the program. 반정부 인사들, 학생 운동가들 및 언론인들이 고문실로 끌려갔다. 전두환의 “사회 정화” 프로그램에 의해 정부는 수십만 명의 폭력배들, 노숙자들, 반정부 인사들과 사회에 불건전한 요소들로 여겨졌던 그외 사람들을 체포해, 트럭에 태워 군 막사로 데려가 잔인할 정도의 재교육을 시켰다. 그 프로그램으로 인해 수 백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North Korea tried to assassinate Mr. Chun while he was visiting Burma, now known as Myanmar, in 1983. Bombs planted by its agents destroyed the Martyrs’ Mausoleum in Yangon (formerly Rangoon), then the Burmese capital, and killed 21 people, including several South Korean cabinet ministers. Mr. Chun escaped the attack because his arrival there had been delayed. 1983년 북한은 전두환이 현재는 미얀마로 알려진 버마를 방문할 때 그를 암살하려고 했다. 북한 요원에 의해 설치된 폭탄이 당시 버마 수도인 양곤(과거에는 랑군)에 있는 순교자의 묘를 파괴했고 몇몇 한국의 국무위원을 포함해 21명이 사망했다. 전두환은 그곳에 도착이 늦어지는 바람에 그 공격을 면했다.

 

Deeply unpopular, Mr. Chun wanted his handpicked successor, Mr. Roh, elected by the same rubber-stamp electoral college. But amid massive protests triggered by the death of a tortured student activist, he and Mr. Roh acceded to a popular election. 매우 인기가 없던 전두환은 자신이 고른 후임자 노태우가 같은 거수기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고문당한 한 학생 운동가의 죽음으로 촉발된 대규모 시위로 전두환과 노태우는 보통선거에 동의했다.

 

Mr. Roh became the country’s first directly elected president in 16 years, thanks largely to the split of opposition votes between the two dissident candidates, Kim Young-sam and Kim Dae-jung, whose mutual mistrust was as deep as their common hatred of military rule. 노태우는 16년만에 한국의 첫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 되었다. 이는 군부 통치에 대한 공통된 증오만큼이나 상호 불신이 깊었던 두 반정부 인사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 사이의 야당 투표가 갈렸기 때문이 주요 이유였다.

 

Mr. Chun tried to appease the public calling for his punishment by going into domestic exile in a remote Buddhist monastery. But after Kim Young-sam took power in 1993, he went after Mr. Chun, Mr. Roh and other former generals once considered untouchable. 전두환은 멀리 떨어진 한 불교사찰로 유배 가는 것으로 처벌을 요구하는 일반 대중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이 집권한 후, 그는 한 때는 넘볼 수도 없을 것으로 여겨졌던 전두환과 노태우 및 다른 전직 장군들을 잡아들였다.

 

Mr. Chun was on his way to the bathroom on Tuesday, assisted by his wife, Lee Soon-ja, when he collapsed, said a senior police officer who was in charge of guarding Mr. Chun’s residence in Seoul. In addition to his wife, he is survived by their four children, Jae-yong, Hyo-sun, Jae-guk and Jae-man. 화요일 서울에 있는 전두환의 거처 경비를 담당하는 한 고위직 경찰관은 전 씨가 부인 이순자 씨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로 가는 중 쓰러졌다고 한다. 전두환은 그의 아내 외에 재명, 효선, 재국과 재만 등 4명의 자녀를 남겼다.

In a Supreme Court ruling in 1997, Mr. Chun was ordered to return 220 billion won, or $190 million, to the state that he had illegally accumulated through bribery. He said he didn’t have enough to pay the fine. Critics accused him of hiding assets in the care of relatives. 1997년 대법원 판결에서 전두환은 뇌물로 불법으로 축적한 2,200억 원(1억 9천만 달러)을 국가에 반납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는 벌금을 낼 돈이 없다고 말했다. 비판자들은 전두환이 친인척들의 관리하에 재산을 숨겨왔다고 비난했다.

Prosecutors have so far collected only half the sum, even though they raided his home to confiscate what they could, including a refrigerator and two dogs. 검찰은 자기들이 압수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압수하기 위해 전두환의 집을 급습했지만 냉장고 한 대와 두 마리의 개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총액의 절반 밖에는 징수하지 못했다.

[출처:뉴스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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