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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조선사』(조윤민, 글항아리)를 읽고

독후감

위택환 칼럼 | 기사입력 2022/05/12 [05:32]

두 얼굴의 조선사』(조윤민, 글항아리)를 읽고

독후감

위택환 칼럼 | 입력 : 2022/05/12 [05:32]

 

 

내가 독후감을 쓰는 것은 읽은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냥 읽고 나면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 다만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정독을 하고 독후감을 기록한다. 두 얼굴의 조선사(조윤민, 글항아리)를 장만한 것은 지난 2016310일이다. 그러니 5년이 훌쩍 지나서야 독후감으로 기록을 남기는 셈이다. ‘군자의 얼굴을 한 야만의 오백년이란 부제의 이 책을 읽은 소감은 조선은 철저한 계급정치가 관철되는 위선의 나라, 지배층은 전쟁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나라였다. 심지어 망국의 책임도 이완용 한사람에게 집중되는 대책없는 나라였다는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리학자들의 가면을 훌륭하게 벗긴 책이라고 생각된다. 그 예로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경기도 안성과 전라도 익산에서 관료생활을 했는데 세금을 가혹하게 거둔 혐의로 파직됐고 이황은 적자와 서자의 구분은 나라와 가정을 유지하는 근본이라고 했다.

 

 

대한제국이 일본과 병합되는 날은 씁쓸하기만 하다. 저자에 따르면 1910년 일본정부 병합조약을 825일에 공포하기로 했었는데 대한제국 정부에서 조약공포를 나흘뒤인 29일로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28일에 있을 대한제국 황제즉위 4주년 축하기념식의 연회를 치른 뒤에 발표하기를 청한 것이다. 나라가 망한다는 의식조차 지배층은 갖지 않았던 것같다.

 

그래서 청()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양반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규정했으며 국가의식의 미약한 조선지배층을 조선망국의 한 요인으로 꼽았다.

 

한국 인민은 양반 관리들을 마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미천한 관직이라도 더없는 영광으로 여겼다. 조정에 벼슬하는 자는 오직 사당(私黨)을 키워 서로 끌어주고 서로 밀치며, 자기 자신만 알고 국가가 있음은 물랐다.(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저자는 사림과 훈구의 구별도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기묘사화때의 인물 90명중 70%가 정도가 한양거주자라는 것이다. 특히 조광조는 공신가문이자 명문거족출신이었다. 사림은 향촌에 기반을 둔 중소지주층이라 잘라 말할 수 없다. 사림파를 대표하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1),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김굉필(金宏弼, 1454~1504),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이황(李滉, 1501~1570), 이이(李珥, 1536~1584) 등은 대규모 토지와 많은 노비를 보유한 부호라는 것이다. 사림파 활동기인 중종이후에는 지배층의 토지소유가 점차 확대되는 추세여서 1580년대 무렵에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 게 일반화되는데, 이 또한 중소지주로서의 사림이라는 설명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청빈한 사림과 축재자 훈구라는 선악구도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사림이 집권했는데 왜 망국의 길로 빠진 것인가. 모두 허세, 위선에 지나지 않았다. 임금에게는 경연과 상소를 통해 왕도사상에 따른 수신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사림은 정쟁을 일삼고 자기수양을 등한시했다.

 

 

미국의 군무관인 조지 클레이턴 포크(George Clayton Foulk)3개월에 걸쳐 조선 중부와 남부지역을 여행하면서 일기형식의 기록을 남겼는데,

관리들은 조세 수취로 백성들을 쥐어짜낸다. ……정부는 하나의 거대한 강도가 됐다.(1884. 11.13~11.14)

1900년대 초 한양에서 생활한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세티는 증인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고문이 가해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는 증인으로 하여금 피고인의 죄를 입증할 증거를 자백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겉으로는 유교이념과 가치를 널리 내세웠지만 백성의 삶의 현장에선 지배세력의 위력에 의해 반유교적 규율과 질서가 관철되고 있었다.

 

 

서원은 강학과 제례기능을 맡은 교육기관에서 토지와 노비를 보유하여 향촌사회의 권력최고정상부에 도달한다. 조선사회의 비극이다. 서원을 중심으로 뭉쳐진 사람·선비집단이 병역을 회피하고 지배구조를 확대하는 과정속에 조선이 자멸한 것이다. 그럼에도 서원을 복원하며 선비문화를 복원시키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국가의 예산이 동원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조선사회의 권력행사 주체인 사람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조선사회의 권력인 사림은 가족-가문이라는 핏줄속으로 도피해 사욕채우기에 급급했다. 그 풍경은 그들이 그토록 경멸했던 바로 그 소인배의 초상이었다.

 

주자가례와 예법을 준수한 사람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정표(旌表) 정책을 실시했다. 열녀문을 세우고 표창하는 정려의 대상이 되면 그 가족에게 면천의 기회가 주어지고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해주었다.

 

18세기 열녀확산은 유교화정책의 한 결과였으며 유교의 가치와 규범이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는 증거였다. 조선의 지배층 남성은 여성에게 정절에 대한 극한의 기준을 강요하고 순결에 대한 일방적인 책임을 요구한 반면 남성자신에게는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 축첩이 허용되었고 혼외정사가 허락되었다.

 

참고로 17세기 무관 박취문(朴就文, 16171690)이 남긴 부북일기(赴北日記)를 보면 당시 양반 계층과 기생 간의 성관계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박취문의 일기는 164412월부터 15개월간 함경도 6진에서 근무하던 기간 작성된 것으로 그와 동침한 기생들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1644년 무과에 급제, 군관으로 일하게 된 박취문은 울산에서 함경도로 올라가는 동안 머물렀던 곳곳에서 민간의 계집종과 기생을 제공받았다.

 

집을 떠난 지 이틀 뒤인 16441211일 그는 어느 좌수(지방 향청의 우두머리)의 집에 숙박하며 그 집 계집종 통진아와 동침했고, 1216일 어성현에 이르러서는 기생 춘일아와 잤다. 1230일에는 강릉부에 이르러 기생 연향과 잤다. 164512일에는 강릉의 (기생) 근리개와 동침했다고 꼼꼼히 기록하고 있고 동행한 군관들의 동침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했다. ‘(군관) 숙회는 (기생) 매화와 잤다’, ‘(군관) 이선달은 기생 대향과, (박취문) 사촌은 기생 막개와 잤다는 식이다. 자신의 사후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일기에 성관계를 상세히 기록했다는 건 당시 도덕적인 관념으로 창피한 게 아니라 양반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다는 걸 입증한다. 임지에서도 방직기(房直妓) 또는 방비(房婢)라 하여 잠자리 시중을 두는 관기나 노비를 공식적으로 두는 나라였던 것이다.

 

이쯤되면 우리가 아는 조선은 고결한 나라라는 이미지는 허구였음이 드러난다. 조선의 사림·선비들은 의무는 하나도 없고 성적 방종과 군역면제라는 특권만 누렸던 것이다. 이러니 끝까지 쇄국정책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유학은 지배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철저한 도구적 지식이었다. 이러한 지식-권력을 보유한 지배계층이 추구한 사회는 인간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극한 신분의 나라,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위계사회였다.

 

 

일제에 의한 식민화이후에도 그 나라를 통치한 양반의 자손들은, 조선 사림의 후예들은 그렇게 해서 몰락하지 않고 존속했다. 위계와 특권이 보장되는 나라로서의 조선은 그래서 지금도 그 속내를 거두지 않는다.……

 

그 조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후예들은 지속되고 있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모양새만 바뀌었을뿐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검찰·법원의 전횡아래 사회의 모든 부문이 기운을 제대로 못펴는 파행상이 연출되고 있다. 너무나도 끔찍하다. 자국 국민을 개돼지로 아는 지배층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현장속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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