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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죽여야 하나, 이겨야 하나?

김영석 칼럼 | 기사입력 2018/04/22 [05:03]

검도,죽여야 하나, 이겨야 하나?

김영석 칼럼 | 입력 : 2018/04/22 [05:03]





어지러운 증상이 잠시, 아주 잠시 잠간동안 찾아온다. 상대의 가격에 머리를 친절하게 내주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있다. 힘있게 내려치는 자세로 보이겠지만 속도와 날카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다 팔뚝의 근육을 사용한 가격이 더해지면 서둘러 막아치기로 모드를 바꾸어야한다. 그런 질나쁜 가격태세 은전을 베풀 의지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쓰리야시' 연습은 고도의 긴장성을 요구한다. 집중해야 한다. 상대방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내 안목에 들어와 있어야한다. 그것을 놓치는 순간 상대는 일도를 날릴것이다. 그런 칼을 맞으면 죽거나 살았어도 치명상을 입게된다. 전쟁터에서는 작은 상처만으로 기세가 꺽이기 마련이다. 그러면 끝이다. 기세를 유지하고 쉴세없는 공세를 펼치 위해선 몸놀림에 익숙해야 한다. 쓰리야시는 그래서 기본중에 기본이다.

그러다 '뿌미꼬미야시'로 넘어가면 밑바닥 체력을 요구하게 된다. 단전에 힘을모아 순간에 기를 뿜어내면서 달리기 선수처럼 몸을 튕겨낸다. 숨을 몰아 짧게 뱉어낼수록 유리하다. 그 간결하면서도 힘이 모아진 내뱉음의 숨소리가 곧 기합이된다. 짧고 간결할수록 효율성 높은 공격이 된다. 그리고 힘을 비축할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연습시간이 길어지면 다 부질없는 요령일뿐이다. 지치는것은 어쩔수 없다. 하체가 흐트러지고, 어깨가 처지게 된다. 그 가볍된 시나이(죽도)는 천근의 무게로 되어버린다. 뿌미꼬미야시의 백미는 인내심이다. 그리고 근성을 키우는데 있다. 지쳐쓰러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칼을 휘두룰수있는 그 근성을 키우는 것이 이 훈련의 백미다.

기본 체력훈련을 마치면 곧바로 ‘멘’을 쓴다. 비로서 무사가 되는 것이다. 무사가 되면 기본기와 기술훈련을 하게된다. 몸과 정신 그리고 검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다. 기본기 훈련에서 가장 많이 하는것이 ‘기리까에시’, 즉 연속공격훈련이다. 머리가격을 주공격방식으로 하고 쉴새없이 적을 몰아붙이는 훈련이다. 내가 치면 상대는 되받고 그것이 끝나면 상대와 역할을 바꿔 반복한다. 즉 공격과 수비 연습을 같이 하는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켄따이이치" 즉 공격과 방어는 하나라고 한다. 다섯번 이상을 하게되면 이미 온몸은 후꾼해지고 도복은 땀에 젖어 무거워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술훈련, 즉’와자’연습은 더욱 많은 체력을 요구한다. 머리치기, 손목치기, 손목과 머리를 동시에 가격하기 등등 기본와자와 고급와자를 골고루 섞는다. 이미 체력은 고갈되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 치고있다. 서있는것 조차도 귀찮게 느껴진다. 어지러움증과 갈증이 동시에 나타난다. 일종의 탈수현상이다. 미리 물을 많이 마셔두지 않으면 이 순간을 가장 많이 후회하게 된다. 무사된 자는 훈련도중에 멘을 벗어던지는 것을 수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나이가 나만치 먹은 사람들은 대게 쉬고 싶어지는것이 자연의 이치이자 섭리 아닌가. 정말 쉬고 싶다. 쉬면서 동료들의 연슴을 보는것도 훈련의 일부라 하여 '미도리게이코'라 부르지 않던가...

그러나 위로는 까맣게 높아보이는 나이든 고수들이 버티고 있고 후배들이 지켜본다. 무엇보다도 아이들 앞에서 멘을 벗어버리는것은 위신을 스스로 깍아먹는 행위일뿐이다. 그래서 여태 주저앉지 못하고 있다.

기본기와 와자훈련이 끝나면 곧이어 '게이코'로 이어진다. 대련훈련이다. 가상이 현실화 되는 것이다. 상대는 이미 기본기 연습을 함께한 동료지만 게이코전에 뛰어들면 그들 모두는 나의 적이된다. 내 아내도, 내 딸들도 대면순간 인정사정 볼것없이 한칼에 날려버려야할 적일뿐이다.
한 칼, 한동작으로 가격하는것을 ‘이치뵤시’라 한다. 겐도에 입문한 자들은 그 심오한 동작을 자기것으로 하기위해 평생을 연마한다. 때때로 그들의 정신과 의지는 깊은 심연속을 정쳐없이 헤엘수도 있다.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여 그 단순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것인지...

이치뵤시는 한동작으로 크던 작던 칼놀림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칼날끝에 힘이 집중이 되고 빠른 속도로 상대를 제압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선 거의 모든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하체가 안정되어야 하고, 단전에 기를 쌍아두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어깨를 가볍게 해야한다. 그래야 가볍게 들어올린 검을 커다란 궤도를 그리며 한동작으내로리칠수 있다. 그렇게 충분조건을 만들기 위해선 상대의 칼부터 제압해야한다. 상대의 칼끝이 살아있으면 제아무리 고수라도 공격은 불가능하다. 적인 이상 내게 틈을 보여줄리도 없거니와 상대로 호시탐탐 나의 약점을 공략하려들것이다. 상대의 집중력을 흐트리거나, 완력으로라도 중심을 잃게해야한다.

가장 어려운 일이다. 검도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상대와의 결전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체력과 기본기를 갖추어야겠지만 상대를 칼끝이전에 제압하기 위해선 ‘나’를 먼저 다스려야 한다. 무심의 상태로 만들어야 상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내것 처럼 된다. 일상생활의 복잡한 사정들이 머리속에 남아 멤돌고 있다면 보이는것은 하나도 없다. 오직 허상만이 아른거릴뿐이며 처참한 결과만이 기다려줄 뿐이다. 어느새 상대는 칼춤을 추며 내머리와 내 손목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고난 이후가 될것이기 때문이다.

그 짧은 대련 시간동안 나는 자신과 무수한 대화를 나누게된다.
...
"그 왼쪽으로 움직이면 나는 반발자욱 앞으로 나간다."
"손목을 먼저 긋고나서 머리를 칠까?"
"아니다. 손목치는 동작을 하는척만 하자. 그때 반격한다."
"왜, 그의 칼이 내칼에 들어오지 않지?" "자세가 흐트려졌나?"
...

되돌아 생각해보니 온통 나에 관련된 것뿐이다. 오로지 나만 보일뿐이다. 그건 아집이고 습관이다.
상대는 현상만 본것이다. 그리고 그의 허수에 무참히 능욕당한 꼴이 된것이다.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이기지 못하면 이 처참함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내 자세, 내 처신의 단점을 극복하지 못했으니 불안함을 처음부터 안고 시작하는것이다. 나를 극복해야 상대가 보인다. 그리고 꼭 짚고 넘어가야 할것 한가지. 본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보호본능에서 비롯된 자세들, 예컨데 고개젖히기, 칼휘두루기 등등은 사람을 비겁하고 비굴하게 만든다. 칼이 날아오기전데 상대의 칼을 기세로 제압한다. 기세로 제압하려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마음이 텅비어 있어야 한다.

무심은 곧 용기이면서 관용이기도 하다. 무심의 상태에서 얻어지는 힘은 매우 깔끔하다. 어쩌다 그런 칼을 맞으면 상대방의 실력과 관용에 오히려 감사하게 된다. 자신의 실수와 패배를 인정하는데 주저할 틈을 주지않기 때문이다. 무심은 또한 지나친 체력소모를 억제해 준다. 꼭 필요할 때 칼을 들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장치가 마련된 고수들의 몸놀림을 보면 감탄하지 않을수없다.

무심의 상태를 얻기위하여, 그리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선 무언가를 비우고 없애야 한다.
그런데 버리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 이미 살아봐서 어렵다는걸 안다. 그런 연유인지아 버려야 할것들이 태산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안되는가 보다. 절반은 습관 때문이고 절반은 두려움으로 쓰레기통이 옆에있어도 버리질 못한다.

무심함을 얻으려면 나를 죽여야 하는가 아니면 나를 이겨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로고.
서로 같은 내용인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다. 죽인다는 것은 있는것을 없이한다는 것이고, 이긴다는 것은 뭔가 있는것을 다스린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무엇을 없애고 무엇을 다스려야하는가?
주관은 없애고 객관은 다스린다?
두려움은 주관이고 자신감은 객관일까?

작은 대답을 자기로부터 우선 듣는다.
" 부정은 죽이고 긍정은 다스린다." 관슴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쌓아두었던 부정적 요소는 시시 때때로 죽여버리는 것에 대해선 거부감이 없다. 당근 그리할진데... 긍정적 요소는 쌓아지는것이 아닌가 보다. 긍정은 의지의 작용이라 쉴새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긍정을 다스린다? 왜? 지나친 긍정은 자만으로 이어지기 때문인다.

이것도 저것도 다 모르겠다면 좌불안석부터 한다.
정자세로 앉아 숨고르기에 열중하는것이 차라리 도움이 될것이다. 긴 호흡을 하되 가능한 내쉬기를 길게 할수록 찰나의 생각과 움직임에 도움이 될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몸과 정신과 검이 하나가 된다는 무심의 경지 '기겐타이이치'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를일.

왜 무사가 되겠다고 나섰는지는 묻는다면 그 대답은 아래와 같다.
자신을 다스리는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렵도다.


<김영석:재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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