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대장내시경과 노먼 락웰

권종상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9/05/23 [15:39]

대장내시경과 노먼 락웰

권종상 논설위원 | 입력 : 2019/05/23 [15:39]



노먼 락웰 Norman Rockwell 은 굳이 말하자면 미국의 김홍도나 신윤복으로 불러도 될 화가입니다. 19세기 말에 태어난 그는 197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스물 두 살 되던 1916년부터 무려 47년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라고 하는 잡지의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렸습니다. 그가 남긴 그림들은 미국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그림들을 통해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의 미국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문득 그의 그림들을 돌아보게 된 건, 우습게도 오늘 저는 몇 시간 있다가 대장 내시경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황당한 말이냐면, 내시경을 하기 위해서는 하루를 완전히 굶고 그 다음날인 오늘, 즉 내시경 시술을 시작하기 전까지도 설사를 하게 만드는 용액을 마시고 계속 속을 비워내야 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하루를 완전히 쫄쫄 물만 마시고 굶다 보니 먹을 것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더군요. 집에 먹을 것들이 없으면 모르는데, 눈 앞에 이것저것 먹을 것들을 두고도 못 먹는 상황이 되다보니 꿈 속에서 무언가를 먹는 꿈을 꿨고 화들짝 놀라 깨었는데, 꿈 속에서 저는 동네 부페집에 가 있었고, 그 부페 식당에 걸린 그림들이 모두 노먼 락웰의 그림이었기 때문에 그를 떠올리게 된 겁니다.

락웰의 그림은 유머러스하고 재미있는데, 그 등장인물들을 보면 모두 빼빼 말라 있습니다. 비만이 국민질병 비슷하게 자리잡은 현대 미국에서는 보기 힘든 사람들의 모습이 괴리감을 자아내기까지 하지요. 락웰이 한참 작품활동을 하던 시기, 즉 20세기 초중반의 평범한 보통 미국인들은 비만한 이들이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도 비만, 즉 과체중이 어떤 사회적 문제 비슷하게 된 것은 거의 최근에 와서의 일이지요.

물론 아직도 세계 곳곳엔 영양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탄생한 이래 이렇게 많은 음식을 즐긴 적은 없었습니다. 부페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즐기는 것도 그렇고, 가공된 음식물들이 상품이 되어 수퍼마켓의 선반을 가득가득 채우고 있는 그런 세상은 과거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입니다. 인간은 먹기 위해 농사를 지어야 했고, 사냥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고, 또 늘 실패의 위험을 안고 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던 불평등은 먹을 것을 힘 가진 누군가가 독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권력 가진 자들의 곳간은 넘쳐도 민중들은 늘 배고파야 했습니다. 기근은 늘 인간을 위협했고, 인간은 늘 배고팠습니다. 그랬던 우리가 언젠가부터 이렇게 '먹을 게 넘쳐나는 세상'에 살게 된 겁니다.

인간은 자기들이 겪었던 배고픔의 기억들을 유전자에 남겨 놓았습니다. 그래서 뭔가 먹을 것이 생기면 일단 먹고 봐야 한다는 것이 본능 속에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대, 수렵을 해서 뭔가를 잡았으면 그것은 폭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식사 다음엔 언제 무엇을 먹게 될 지 모르니. 그런 시대가 인류라는 종이 생겨나고 나서 수십만년간 지속돼 왔습니다. 인간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러 먹을것을 스스로 제대로 해결한 시대는 그 긴 인간의 존재 기간동안 겨우 몇천 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산업혁명 이후에도 인간은 계속 굶었습니다. 그때는 생산의 문제라기보다는 분배의 문제에 더 가까웠을 겁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굶어 죽으면 결국 자기들도 망한다는 것을 알게 된 자본가들과 지배 계급은 노동운동을 허용하고 복지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체제를 유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건 우리가 복지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곳들의 이야기였고, 미국도 소련과 체제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탈당하는 곳에서는 계속 굶주림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나, 인류가 '비만'을 걱정할 정도로 식량의 풍족함을 누리고 있는 건 이제 겨우 몇십년이 안 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폭식의 유전자'를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과거 수십만년의 인류 역사를 통해 본능으로 남아 있는 것들이 아직도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인류가 그렇게 오랫동안 갖고 있던 식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폭식을 하게 만들고, 그것은 우리를 살찌게 만들고 있지요. 그리고 과식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질병, '습관병'이라는 질환을 만들어 냈습니다. 당뇨병, 대장암, 동맥경화... 현대에 흔한 질환들, 과거 '성인병'이라고 불리웠던 병들의 대부분 우리의 식습관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환이지요.

심지어는 미국인들도 몇십년까지는 빼빼 마른 체형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다시 그림을 들여다보며 확인합니다. 지금 우리는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마음도 함께 풍족할까요? 마음 속에서 느끼는 공허함과 부족함을 식탐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 식탐이란 것이 오래 전엔 육신의 생존을 위해 우리 유전자에 각인된 것이었으나, 지금의 식탐은 우리의 정신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것은 아닐까요? 조금 더 서로를 배려하는 세상, 조금 더 사람사는 세상이 온다면 우리는 혹시 지금의 식탐에서 조금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부페 식당에 걸려 있던 노먼 락웰의 그림들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왜 하필이면, 그 식당엔 그렇게 노먼 락웰의 그림을 걸어 놓았을까요? 그 시대보다 지금 우리는 먹을 게 풍부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건 아닐 것이고, 그때의 미국에서는 존재하고 있었던 어떤 가치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에 대한 향수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몇 시간만 있으면 저는 다시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을 찾아 먹겠지요. 으윽, 다시 변기로 달려가야 하나 봅니다. 속을 이렇게 비웠는데도 아직도 뭔가를 비워내야 하네요. 암튼 오늘 대장내시경 결과가 잘 나오기를 바래야 하는, 그런 나이가 되었는데 저는 아직 식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뭐, 유전자의 핑계를 대고는 있습니다만, 저는 먹는 걸 무척 좋아하는 식탐 많은 아저씨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고.

그래도 노먼 락웰의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마음이 뭔가 푸근해집니다.

시애틀에서...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