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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피즘의 득세

김영석 칼럼 | 기사입력 2020/12/17 [06:05]

트럼피즘의 득세

김영석 칼럼 | 입력 : 2020/12/17 [06:05]

 

지난 4 년간 혼돈의 시기를 뭐라고 부르게 될까? 트럼프가 집권했으니 트럼프 정권이라 불려지겠지만 아마도 그보다는 ‘트럼피즘(Trumpysm)’이라는 정치학적 신조어로 불리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트럼피즘은 트럼프 집권 시기 동안 행해진 정치, 경제, 군사 그리고 외교 정책에 골간을 이루고 깊이  녹아들었던 기본적 가치를 말하는 것 같다.

 

트럼피즘을 연구하는 몇몇 학자는 트럼피즘의 원형이 잭슨 시대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한다. 미국인의 뼛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정치사상적 유산이라고 주장한다.  이유는 서너 가지의 유사성에 근거한다. 트럼피즘을 이해하려면  먼저 ‘잭소니안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으로 불리는 잭슨의 사상을 살펴봐야 한다.  

 

제 7 대 대통령이었던 <앤드류 잭슨 Andrew Jackson>은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다. 

 

독립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장군으로 유명세를 날렸고 신생국을 건설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고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대통령으로서 업적은 미국에 비로소 독자적인 정치문화를 정착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야전 군인으로 잔뼈가 굶어졌던 인물이었기에 그는 매사 주적 개념이 명확했고, 투철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재임하던 시기의 미국은 정치와 경제가 유럽의 영향권 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정권은 불안했고 경제는 예속되었다. 그 당시 유럽을 휩쓸던 공화제의 거센 파도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도 상륙했는데 유럽의 귀족 대접을 받던 기득권 세력과의 다툼 속에서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독립운동 시기에 등장한 신흥 독립 세력과 결탁하여 출범한 정권이지만 온전하게 공화제를 실현할 수 없었다.

 

유럽의 영향권으로 부터 벗어나고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는 것이 잭슨 정권의 숙명적 과제였다. 굳이 공화제를 찾지 않더라고 선거권을 일반 민중에게로 확대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이전까지 선거권은 귀족과 지주에게만 속했던 권한이었다. 선거권을 세금을 내는 모든 백인에게

 

확대하면서 잭슨 정권은 비로소 지지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선거권의 확대는 참정권의 확대를 의미한다. 정부 구성 역시 일반 백인에게 기회가 제공되었다.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던 반대파를 몰아내고 공화제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반대파의 (기득권 세력) 반발로 정국은 사사로이 요동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대외적으로도 고립주의를 표방했다. 무엇보다도 잭슨의 야망이 깃들어 있던 팽창정책은 사사건건 유럽의 간섭과 방해에 부딪혔다. 유럽과의 대립은 은행가, 자산가와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유럽에 기반을 둔 은행과 자산가 계급은 잭슨 정권의 돈줄을 틀어 막았다. 그 결과로 팽창정책은 지지부진했다. 여건이 어려워지고 궁지로 몰릴수록 잭슨 정권이 더욱 기대 것은 지지 세력인 ‘일반인’ 이었고 포퓰리즘 정책이 남발되었다. 그러나 포퓰리즘식 정책은 남북 갈등을 야기시켰고 국론분열을 일으켰다. 정치적으로 배제되고 경제적으로 불이익에 직면한 남부의 귀족세력과 지주, 상공인 그리고 자산가는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고 결국 남북 갈등은 내전을 향해 치닫게 되었다. 

 

앤드류 잭슨만큼 미국 역사에서 논쟁의 중심에 선 정치인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과도기에 들어선 그 시대의 정치가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기도 했지만  잭슨의 개인적 성격이 작용한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 전기 소설과 같은 문학에서는 그를 독립군 출신답게 신념과 의지가 강한 인물로 그려지고 또한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한다. 그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평생 군인이었던 인물이다. 밀어붙이는 것을 장기로 삼았는데 그로 인해 주변에는 정적이 많았고 외교적으로도 불필요한 갈등을 자초했다. 

 

트럼피즘과 제퍼슨 정책의  유사성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이 포퓰리즘이다.  지지 기반이 약한 ‘초자’ 정치인이 대권을 잡으면 집착하게 되는 포퓰리즘의 길을 둘 다 걸었다.  두 번째로 거론되는 유사성은 ‘미국 우선주의'다  내용은 다르겠지만 그 근저에 흐르는 성격은 거의 같아 보인다. 미국은 허약하고 느낄 때 스스로 고립주의 모드로 전환한다.     

 

트럼피즘이 추구한 미국 우선주의는 실추한 자존심의 회복을 위한 방책의 하나였다. 제퍼슨 시대에 미국인이 모국에 대해 느꼈던 열등감과 무역 역조 현상 이후의 미국인이 겪고 있는 열등감의 정도가 비슷한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이류 국가로 전락한 미국인(주로 백인)에게 열등감을 부추기고 자극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위험한 도박 행위나 다름없지만, 외교나 군사에서 자국 중심의 정책을 밀어붙이는데 동기부여를 한다는 것만큼은 확인된 셈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트럼피즘에 열광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정치 냉소주의를 정치화한 일대 사건에 해당된다. 즉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경원시되었던 중하층을 하나로 묶어 정치 세력화한 정치적 사건이다.  앤드류 잭슨과 트럼프의 한 가지 공통점은 기성 정치인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를 부정하고 심지어 손가락 질을 했던 것은 그가 일반적 통념의 정치인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근엄하고 신중해야 하는 기성 정치인의 일반적 이미지를 트럼프에게서는 애초부터 찾아볼 수 없다. 트럼프는 마치 정치풍자 쇼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저속하고, 비열하고, 거짓으로 점철된 뜨내기 정치인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기성 정치권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는 기성 정치권에  환멸을 느끼도록 조장했다고 추리할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가 가진 고유의 성격인지 따지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역시 정치인이라 대중의 관심과 인기에 영합하는 자질을 십분 발휘함으로써 지지기반이 허약했다는 단점을 극복했다. 당내 기득권 세력에게도 트럼프는 부담스러운 존재다. 그에게는 관행이라는 것이 별로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다.  전통적인 지지 기반에 기대어 살던 기성 정치인에게 트럼프와 트럼피즘은 방해꾼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선거를 통해 정권을 되찾았다고 해서 과연 민주당이 흡족해할까? 아마도 지금 쯤 골머리가 썩어가고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4 년간 트럼프가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쓰레기를 처리해야 하는 일은 둘째로 치더라도 결코 해결될 것 같지 않을 난제들이 몇 가지 남아있다. 당장에 민주당은 2 년 후에 치러야 할 중간선거를 걱정해야 한다. 지방의회와 하원을 장악해야 정국 안정을 꾀할 수 있다. 그리고 4 년후 공화당이 반격해 올 것이다. 여차하면 트럼프의 재 등장을 보게될 수도 있다. 현재로서는 그를 상대하기에는 버겁기도 하고 시간이 너무도 부족하다.  이번 대선 이전에 민주당의 구상속에는 바이든 정부는 없었다. 승리를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4 년후 차기 대선에서 정권을 잡고 장기 집권으로 가겠다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민주당의 장기적 계획과 총적 목표는 연방의회를 장악하고 체질 개선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30-40 대 유권자가 느끼는 보편적 가치를 당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동안 취약했던 지방 의회와 연방 하원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 

 

바이든의 승리가 운이 따랐다고 말하는 것은 공화당 지지층으로  분류되는 지역이 반 트럼프 진영으로 기울었던 탓에 얻어진 결과였다. 지금의 분위기가 2 년 후 그리고 4 년 후에도 지속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어찌 되었건 선거 결과에 따라 정권을 잡은 바이든 정부는 엉겁결에 난제를 떠맡게 되었다.  분열을 극복해야 하고 찢어진 상처를 꿰매는 일이다. 현재까지 나타나는 현상은 선거 이후에 보여주던 일반적 양상과는 전혀 다르다.  언론에서도  ‘분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사회적 위기가 찾아왔음을 강조한다. 한쪽의 민심은 차분하게 사태를 관망하려고 하지만 다른 한 쪽의 민심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  

 

이전까지 양당체제에 의해 양분되었던 지지층의 성격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정책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여줬을 뿐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트러피즘의 등장으로 정치적 지형의 변화와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마치 양당체제를 송두리 채 뒤엎어버린 것처럼  전통적 지지층과 텃밭이 뒤바뀌거나 뒤섞여 버렸다. 이 와중에 제3의 세력이 등장해도 될 법하다.  공화당 지지층과 지형의 변화가 특히 두드러졌다. 공화당 내에서도 친트럼프와 반트럼프로 나뉘면서 양 진영 간의 견제와 알륵이 심해지면서 갈피를 잡지 못한 듯하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유사한 현상이 민주당에서도 보인다. 민주당 내 극우 보수세력과 트럼프와 지지 세력 간의 연대가 실제로 이루어질지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왜 이런 현상이 유독 최근에 일어나는 걸까?  그 모든 이유와 원인을 트럼프 때문이라며 그에게 덮어 씌우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시대의 흐름으로 이해해야 하며 결국 모든 정치적 문제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경제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트럼피즘의 등장을 역사의 필연으로 생각한다. 싫든 좋든 트럼피즘에는 약 절반에 해당하는 미국인의 시대적 관점과 현실 의식이 고스란히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백인은 대체로 민주당보다는 공화당에게서 보편성을 느낀다. 공화당이 백인 주류 계층과 중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서 그럴 것이다. 거의 모든 선거에서 결정권을 행사한 유권자는 (백인) 중산층이었다. 백인 중산층의 입장에서 보면 공화당은 이율배반적이다. 자기편에 서있는지 의심한다. 민주당에게서 느끼는 괴리감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바꿔 말하면 중산층은 양당 체제와 중산층은 자신에게 편의와  먹거리를 제공하는 쪽을 선택한다.  트럼피즘이 등장하고 성장한 배경에는 중산층의 역할이 한 몫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산층으로 하여금 트럼프를 선택하게 했을까?

 

중산층이 몰락하기 시작하던 1980 년대 이들을 대변하는 정당은 없었다. 응당 공화당이 이들 산업 근로자를 비롯한 도시의 화이트 칼라 근로자의 버팀목이 되어야 했는데 산업 재편기에 들어선 자본가의 이익을 챙겨주는데 급급했다. 민주당은 원래 도시의 중산층과 산업지대의 노동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은 농촌인지라 실업, 빈민과 같은 도시의 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복음주의 기독교 사상을 바탕에 두고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을 마치 진보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아직도 남아있다. 

 

중산층은 베트남전 이후 나락으로 추락하는 미국의 모습과 신통하게도 닮았다. 한 때 번영을 구가하던 중부와 남부 주에 속한 대도시에는 거대한 실업자군을 품어 안은 채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한때는 중산층이었으나 지금은 빈곤 계층으로 전락한 백인이 그곳에 살고 있다. 

 

2010년 인구조사에서 빈곤 계층으로 분류되는 인구는 약 12%였다. 이 중에서 백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10%, 숫자로 환산하면 약 2 천 4 백만 명이 빈곤층을 구성한다. 트럼피즘을 신봉하는 백인 유권자는 빈민과 함께 중산층으로 분류되더라도 경제적 수준이 현저히 낮은 저소득층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있다. 분류상으로만 중산층이지 실상은 빈민에 속한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미국에서의 평균이 다른 OECD 국가와 비교하면 평균치 이하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하위 중산층은 유럽에서는 빈민에 속한다. 미국 내에서도 대도시 근로자와 비교하면 상대적 빈곤율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수치로 계산하기도 어렵다. 

 

이 두 그룹(빈민+하위 중산층)을 합산하면 백인 인구의 약 30%가 상대적 빈곤 계층으로 분류되는데, 이들은 또한 저학력 군으로 분류된다. 고급 일자리 찾아서 대도시로 나올 수도 없기에 그나마 노동 인력이 필요한 농촌과 생산기지가 남아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현재 미국의 삶은 절망적이다. 무엇보다도 미래가 불투명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보건과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인구가 10%다.  노후 대책은 꿈같은 이야기다. 60세 전후로 은퇴하고 정부 보조금으로 연명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다. 그러나 앞으로 10 년 후, 20 년 후에도 지금과 같은 혜택이(?) 보장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한 가지 위안으로 삼는 것은 유색인종의 빈곤층과 비교했을 때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미국을 다시 위대한 국가로 만들자'는 트럼프의 구호는 결코 빈말이 아닌 절박한 호소다.  모든 것에서 뒤처지고 부족하니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자신감은 땅에 떨어졌다. 일자리를 잃은 것도 남 탓이고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남의 탓이다. 유색 인종을 증오하고, 유태인을 혐오하며 중국을 비롯한 신흥 경제개발국 심지어 유럽의 동맹국에게 까지 위협을 느낀다.

 

중상위 중산층이 트럼피즘에 기대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들 빈민층의 문제를 바로잡아줄 적임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혹자는 트럼피즘을 백인우월주의가 기형화 되어 파생된 별개의 현상으로 구분 지으려고 하지만 이것은 트럼프 개인의 사상이 아니라 이미 미국인 일반에게는 잘 적용되는 사고방식의 결과물이다. 복지와 의료는 철저히 개인에 속하는 문제로 인식한다. 개인주의적 가치관으로 어릴 적부터 길들여진 보통의 미국인이 가진 보편적 문제의식이란, 빈곤은 게으름의 결과이고 부는 성실함의 결과라는 것이다. 부의 사회적  분배가 어불성설이 되고 복지 정책이 정착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선거에서도 트럼피즘은 중산층을 둘로 쪼개는 저력을 발휘했다. 트럼피즘을 옹호하는 지지층에서는 미국이 처한 현실을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반영한 것이라면서 열광한다. 그 반대 진영에서는 포퓰리즘의 전형이고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비 민주적, 반 미국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그 반대 진영의 주장 역시 모순투성이다. 미국은 과거에도 위대했고  현재도 위대하며 그리고 미래에도 위대한 국가로 남아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초강대국의 지위는 변한 적이 없다는 시대착오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주장을 펼친다.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논리의 모순은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열등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방법을 달리 했을 뿐이다. 한쪽에서는 아우성이 일고, 다른 한쪽에서는 짐짓 모른 채 무관심하게 대한다. 관점의 차이가 분열의 시작이다.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계층과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계층 간의 관점이 극명하게 구분되면서 서로 대립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트럼 피즘의 등장 이후 미국의 모습이다. 크게 보면 두 개의 미국이지만 관점을 달리하는 미국인에 따라 최대 수 백, 수 천 개의 미국이 존재한다. 트럼 피즘이 추구하는 미국의 모습 또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위대해지려면 근본적 문제부터 해결해야겠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해결 의지를 찾아볼 수 없다. 근본적 문제란 만연해 있는 인종차별과 계급, 계층 간의 빈부의 격차가 날이 갈수록 넓어지는 것이다. 빈부의 차이를 줄이려면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한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미국에는 사상적, 정신적 그리고 문화적 토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 * 주류사회를 구성하는 백인 중산층의 관점은 사뭇 다르다. 미국은 언제나 초강대국이었다. 미국은 과거에도 위대했고 현재도 위대하며 그리고 미래에도 위대한 국가로 남아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반면 트러피즘을 지지하는 중산층에서는 과거 레이건 시대로 되돌아가 강력한 미국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이든 당선자 역시 분열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당선자의 첫 일성으로 내놓은 담화의 주제가  화합이었다. 그런데 바이든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는 국제관계의 개선이다.  바이든 스스로 외교에 일가견 있음을 내세우면서 동맹국과의 관계 개선이 중요하다고 공공연하게 밝혔지만 정국을 안정시켜야 하는 것이 우선적 과제다.  바이든 정부가 넘어야 할 첫 번째 장애물은 트럼피즘이다. 트럼피즘이 소수의 극렬 지지층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지례 짐작했다면 오판이다. 4 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지지자를 포함한 다수 대중의 사고를 지배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으로 평가된다. 오바마 정권 기간 8 년을 되돌아보면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오바마는 첫 흑인 대통령이라는 레벨과 노벨평화상 수상 등 개인적인 경력은 화려했지만 이념과 정책은 모호하기만 하다. 외교에서도 업적은 미미하다. 

트럼피즘은 미국인의 삶의 곳곳에서 그 기를 뿜어내고 있다. 정치는 기본이고 사회, 경제, 군사 그리고 외교에서 까지 트럼피즘이라는 외피를 뒤집어 쓰고 미국제일주의를 감행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트럼피즘은 이미 선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지지기반이 미비했던 정치인 트럼프의 입지는 단단해졌다. 트럼피즘을 둘러싸고 있는 외피는 이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트럼피즘이 불러온 ‘놀라운’ 효과로 지적하는 것이 선거 지형의 변화다. 언론에서는 공화당의 패인으로 전통적 지지기반이 무너져 내린 것을 지적하지만 민주당 역시 전통적 지지 기반이 무너져 내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것은 세대교체가 이미 성숙한 단계로 발전했음을 의미한다. 차세대 주자인 밀레니얼 세대(30세 전후)의 의견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트럼피즘을 옹호하는 30대는 고리타분한 민주당 보다는 정치판을 아예 아수라판으로라도 만들어 놓는 공화당이 더 낫다고 판단한다. 보수를 지향하더라도 요즈음 밀레니얼 세대는 변화에 목말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트럼피즘이 시대의 변화를 이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보다 나은 대안이 없는한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이 처한 현실이다.  

앞으로 최소 2 년간 또는 바이든 임기 내내 트럼피즘은 맹렬하게 그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바이든이 등장했으니 트럼피즘이 곧 극복될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것은 안일한 관점이다.  트럼피즘은 한 시대를 관통하던 사회적 고민의 집합체이기에 다 해소되기도 어렵거니와 오래도록 잔재로 남을 것이다. 트러피즘의 준동은 바이든 정권이 가는 길목마다 복병처럼 들고 일어나 정치권을 괴롭힐 것이고 그 파장을 고스란히 떠안아야만 하는 세계는 그 때마다 어지럼증을 호소하게 될 것이다. 트럼피즘을 청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이 건국이념과 정신에 따라 민주주의를 옳게 정착시키는 것이다. 늦었지만 아직 때를 잃지는 않았다. 그러나 트럼피즘은 마치 염증과 같아서  이대로 방치하면 병색은 깊어지고 합병증을 유발한다.  미국의 분열은 선거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할 것이고 언제가 분열이 현실화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김영석:재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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