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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이육사기념사업회 시민과 함께 역사문화기행 이육사 묘소 참배

이육사문학관, 퇴계종택, 임청각, 아동문학가 권정생 작가 생가에서 삶을 배우며

고경하 | 기사입력 2021/04/28 [23:29]

대구이육사기념사업회 시민과 함께 역사문화기행 이육사 묘소 참배

이육사문학관, 퇴계종택, 임청각, 아동문학가 권정생 작가 생가에서 삶을 배우며

고경하 | 입력 : 2021/04/28 [23:29]

 

▲ 시민과 함께하는 역사문화기행 이육사 묘소 참배, 문학관, 퇴계종택, 임청각, 권정생 생가 탐방하고 있는 대구이육사기념사업회 운영위원 회

 

[국민뉴스=고경하 기자] 대구이육사기념사업회(상임대표 문해청)는 25일 2021년 [광야에서] 역사문화기행을 통해 경북 안동지역의 인문학이 녹아있는 현장의 삶을 함께 보고 들으며 배우는 기행을 했다. 

 

주최 측은 오전 8시 대구 출발해서 10시 안동시 안동면 도산리 도착했다. 이어 11시 경 이육사 묘소 참배했고 제수용품 떡, 과일, 대추, 명태포 등을 올리고 일동 큰 절을 했다. 이어 이육사 선생을 추모하는 「광야」 시낭송을 고경하 사무처장, 「광야에서」 노래는 서강민 홍보기획부장, 「꽃」 시낭송을 문홍주 조직차장이 했다. 공식 묘소 참배를 마치고 “통일은 어떻게 해야 이루어 질 수 있는가?” ‘한반도 단일 깃발’로 하는 게임을 함께하고 마무리했다. 

 

▲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의 청포도 시비 앞에서 함께하는 회원 문홍주, 강성모, 고경하, 이훈, 정유선, 남원환

▲ 한반도단일깃발에 평화협정체결 종전선언 미군철수 북녘 남녘 교류협력 등을 적어 조국통일의 진정한 실현을 바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은 일요일이라 ‘이육사문학관’에 안내가 없는 건지? 상근직원도 정년퇴직하고 없는 건지? 역사문화기행을 함께 갔던 회원들은 “안내하고 반겨주는 사람이 없이 단체사진 찍고 관람하는 과정이 왠지 불편했다”며 시정할 것을 호소했다. 

 

마지막 기행은 아동문학가 권정생 생가이다. 권 작가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책을 출간해서 받았던 인지세, 상금 전액을 북녘어린이재단에 보냈다. 권 작가는 교회종지기 삶을 살며 작품에 열정을 다했다. 그는 누구보다 분단의 모순을 먼저 알고 통일을 만들어 가는 일에 솔선수범했다.

 

▲ 문홍주 차장이 아동문학가 권정생 작가 약력을 낭독하고 있다

▲ 민족작가연합 상임대표 시인 김창규 목사가 권정생 작가의 삶을 강의

 

권정생 작가의 생가와 주변은 환경정비와 신축건축 및 토목공사로 인해 과거 권 작가의 삶이 녹아나는 생가의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권 작가의 삶이 녹아나는 생가 주변의 기억은 허망하게 무너져 사라지고 있다. 권 작가 기념관은 짓지는 못 할망정 이런 비상식적 상황은 개혁해야 한다. 

 

먼저 경북도청, 안동시청 지자체 단체장이 권 작가의 역사문화문학유적 지역의 가치를 인식하고 지킬 수 있도록 두 팔 걷고 나서야 한다. 

 

▲ 고경하 시인이 김창규 시인을 환영하는 헌시로 이육사 선생의 [광야] 시를 낭송하고 있다

 

이날 충북 청주에서 한걸음에 달려왔던 민족작가연합 상임대표 시인 김창규 목사(나눔교회)는 문학 강론 통해 “권정생 작가는 살아서 일제식민사관을 거부했고 1980년 대 광주민중항쟁의 정당성과 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권력 부당성을 주장했다” “권 작가는 민족민중아동문학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다” 

 

이어 권 작가는 “북녘 남녘 통일을 위해 북녘 남녘 차별 없이 어린이를 사랑하고 헌신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현재 정부와 지자체는 권정생 생가 고택보존을 제대로 하도록 베풀고 권 작가의 명예로운 고마움에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광야에서] 역사문화기행 참가 회원 교양자료

 

 

이육사 선생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저항시인 이육사는 평생 치열한 민족정신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대구형무소에서 264수번을 달았다. 이후 17번 옥고로 인해 몸이 쇠약해진 뒤에는 한때 포항 경주 등지에서 요양을 했다. 불굴의 정신으로 총칼 대신 날카로운 펜을 휘둘렀고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비타협으로 일제와 싸웠던 독립투사 민족시인이다. 

 

이육사 시 詩 <광야〉에는 대한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염원하는 시어로 가득 차 있다. 1945년 12월 17일자 ‘자유신문’에 발표된 이 시에 대하여 평론가 김용직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가운데 유례가 없을 정도로 든든한 구조를 가진 작품”이라고 찬탄했다. 

 

이외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청포도〉, <절정〉, 〈황혼〉등에는 암울한 식민지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통스런 현실과 이를 극복하려고 하는 투철한 의지가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퇴계 이황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는 지금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이다.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 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했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詩)는 이황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1527년(중종 22)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했다.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 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했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이 해에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정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7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했다.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곧 임금으로부터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택을 받았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이 무렵부터 정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하다. 1543년 10월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 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했다. 1546년(명종 1)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았다.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하였다. 1548년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았다.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였다. 1552년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했다. 1543년 이후부터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했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이황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었다.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며 자주 초빙했으나, 이황은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567년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이황을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이황을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며 간절히 초빙했다. 이황은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았다. 그리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頤)의「사잠(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1569년(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 해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했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다.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임청각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선생의 아들, 손자 등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했다. 3대에 걸쳐서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1월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1925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독립운동계 분파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 일제 강점기 일본에 저항하는 정기를 끊기 위해 집 앞으로 중앙선 철길을 돌려서 놓았다는 석주 이상룡 고택을 탐방하며 자주독립운동정신계승_

▲ 석주 이상룡 고택 임청각에서 대구이육사기념사업회 좌상으로부터 서강민(성화), 남원환, 이훈, 김창규, 문해청, 고경하, 정유선, 문홍주_



망명 직전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또한 선생은 망명 직전 임청각에 있는 사당으로 올라가 신주와 조상 위패를 땅에 묻었다. 그리고 “나라가 독립되기 전에는 절대 귀국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만주 망명길에 오른 2년 뒤인 1913년에는 아들 이준형에게 “조선으로(국내로) 들어가 임청각을 처분하라”고 하였다. 그 후 국내로 들어온 아들 이준형이 “임청각을 팔겠다”고 했다. 문중에서 이를 말리면서 독립운동 자금 500원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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