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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 윤상원 민중항쟁 전시회 글, 수묵, 사진으로 만나다

문해청 기자 | 기사입력 2021/11/23 [00:05]

임을 위한 행진곡 윤상원 민중항쟁 전시회 글, 수묵, 사진으로 만나다

문해청 기자 | 입력 : 2021/11/23 [00:05]

▲ 광천- 죽음을 각오하다. 200x366 한지수묵담채 2021

 

윤상원 열사는 전남도청을 사수하며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하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국민뉴스=문해청 기자] )윤상원기념사업회는 지난 1117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인사동 코트 갤러리(KOTE Gallery)에서 글과 수묵, 사진으로 만나는 임을 위한 행진곡, 윤상원 전시회(에이치스토리 이사 성효경)를 열고 있다.

 

▲ 귀향-그래 광주로 돌아가자 200x 366cm 한지수묵담채 2021


후원단체는 학림동지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종로구청,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국민은행노동조합, 살레시오서울동문회, 도서출판동녘이다.

 

전시 1실에는 하성흡의 수묵으로 그린 윤상원 일대기와 김광례의 윤상원열사 흉상 조소, 2실에는 성남훈의 사진과 김상집의 평전으로 가는 5월 그날의 현장, 3실에는 열사의 일기로 보는 노동운동가 윤상원열사, 4실에는 김지욱의 영상으로 듣는 5인의 그날의 증언’, 5실에는 쿤낫, 주용성의 아시아 현장 사진전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노래가 전시되어 있다.

 

▲ 포-피눈물을 흘리는 처절함 속에서200x122cm 한지수묵담채


전시1실 하성흡의 수묵으로 그린 윤상원 일대기

화가 하성흡, 5.18 당시 고 3이던 하성흡은 당시 희생된 분들에 대해 광주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크나큰 부채의식을 지닌 채 살아왔다.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죽기 싫었고 이 상황을 언젠가 그림으로 남기겠다는 자기합리화를 하며 집으로 도망쳤던열아홉살의 소년 하성흡이 이제 원숙한 중견화가가 되어 그날의 약속을 지킨다. 윤상원의 불꽃같은 생애를 총 12점의 대작으로 그린 <역사의 피뢰침, 윤상원> 그림이 전시 되어 있다.

 

▲ 도청 분수대

 

▲ 도청 민원실


전시2실 성남훈의 사진과 김상집의 평전으로 가는 5월 그날의 현장

세계보도사진가상(World Press Photo)을 세 번이나 수상한 한국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 성남훈이 윤상원 열사의 행적을 사진으로 쫓았다. 성남훈의 예리하고 서정적인 사진의 시선은 오늘의 공간에서 그날의 현장을 불러내, 그날의 창 앞에, 그날의 함성 속에 우리를 서게 한다. 805월 항쟁 당시 녹두서점에서 윤상원과 함께 투사회보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배포했던 동지이자 친우 김상집이 쓴 윤상원 평전이 사진과 함께 한다.

 

▲ 윤상원 열사 흉상 조소

 

▲ 윤상원 평전

 

▲ 생전의 윤상원 열사


전시3_ 일기로 보는 노동운동가 윤상원

윤상원 열사는 임곡초등학교 4학년부터 두 할머니 중 작은 할머니의 지도로 일기를 쓰기 시작해 광주북중학교와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꾸준히 썼다. 이후 전남대 문리대 재학 시절과 그 이후에도 일기 쓰기를 이어갔으며 광주항쟁이 시작되면서 멈추었다. 윤상원 열사가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시기의 일기를 볼 수 있다.

 

▲ 78.10.25 일기

 

▲ 78.10.29 일기


전시4실 김지욱의 영상전시로 듣는 그날의 증언

당시 5월의 뜨거운 현장 속에 있었던 이태복, 김상윤, 이양현, 김상집, 전용호 등 5인의 육성 인터뷰를 비주얼아티스트 김지욱의 영상으로 만난다.

 

전시5실 쿤낫, 주용성의 아시아 현장 사진전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노래

윤상원 열사에게서 비롯된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오늘날 광주를 넘어 홍콩, 미얀마 등 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운 아시아 여러 나라의 현장에서 여전히 불리고 있다. 한국의 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주용성의 홍콩 민주항쟁 현장사진과 미얀마의 사진가 쿤 낫의 미얀마 쿠데타 반대 시위 현장사진들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등이 있다.

 

윤상원 열사는 1950, 현재 광주광역시로 편입된 전남 광산군 임곡 천동마을에서 태어나 살레시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다. 1975년 제대한 뒤 유신독재에 신음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에 눈뜬다. 졸업 후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한 윤상원은 공장에 취직하여 노동 현장을 누비는 한편 들불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19805,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발발하자 같이 노동운동을 하던 김상집 등과 함께 화염병과 투사 회보를 만들어 공수부대와 맞서 싸운다. 521,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가 가해진 이후에는 시민군 대변인이 되었고 외신기자회견을 열어 학살의 진상을 세계에 알린다.

 

시민군 대변인으로서 '총기 회수, 협상 분위기 조성'을 바라는 재야 수습위원회와 '무장해제 반대, 결사 투쟁'을 외치는 학생수습위원회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고, 대학생과 예비군을 재무장시켜 마침내 민주투쟁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527일 새벽, 결사항전을 이끌다 장렬하게 산화한다.

 

윤상원 기념사업회 이사장 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윤상원 일대기 역사의 기록화>로 시작해서 <글과 수묵, 사진으로 만나는, 임을 위한 행진곡, 윤상원>으로 전시회가 확대되었다. 장소도 광주에서 출발하여 부산, 울산, 서울, 수원, 인천, 대구, 원주, 대전 등 전국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규모도 커졌지만, 덮여져 있던 역사의 진실이 오롯이 담겨지기 시작했다.

 

고립무원이 된 광주에서 항쟁의 에너지를 결집해나가고 지도하면서 전남도청에서 산화한 윤상원을 12폭의 그림으로 그려낸 하성흡님의 수묵화, 김광례님의 윤상원 흉상 조소, 투사로서의 윤상원뿐 아니라, 그의 사상, 인생관을 정면에서 써내려간 김상집님의 윤상원 평전, 당시 5월의 뜨거운 역사와 함께한 이태복, 김상윤, 이양현, 김상집, 전용호님 등 5인의 증언이 담긴 김지욱님의 영상전시, 5월 그날의 현장으로 안내하는 성남훈님의 사진, 광주를 넘어 민주화의 열기가 홍콩(주용성), 미얀마(쿤낫) 등 아시아 곳곳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음을 증거하는 사진들이 전시회에 녹아 있다.

 

805월 광주민중항쟁의 상징이자, 한국민주화투쟁의 역사에서 찬연한 빛을 발하는 인물이 바로 윤상원이기 때문이다. 윤상원은 광주시민의 눈과 귀와 입이었던 투사회보의 발행인이자 민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이기도 했고, 전민노련(전국민주노동자연맹)의 중앙위원으로 조직적인 노동운동가이기도 했다.

 

윤상원은 계엄군의 총탄에 산화되기 직전인 526일 외신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오늘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40여년이 지난 지금 임을 위한 행진곡을 숱하게 부르면서도 막상 그 주인공과 진실의 순간들을 우리는 잊고 있다. 그래서 전시회 안에 <윤상원과 5.18의 진실>이라는 작은 이야기마당과 윤선애님의 노래마당을 통해서 윤상원의 진면목을 공개하고, 역사의 진실을 되묻고자 한다.

 

[선언문] 전문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 시민군 대표 -

 

먼저 이 고장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다 목숨을 바친 시민 학생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본인이 알기로는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은

과도 정부의 2~3일 내 중대 발표와,

또 자제하고 관망하라는 말을 믿고,

학생들은 17일부터 학업에, 시민들은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 당국에서는 17일 야간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일부 학생과 민주 인사, 정치인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구실로

불법 연행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시민 모두는 의아해했습니다.

 

또한, 18일 아침에 각 학교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대검을 꽂고 돌격 앞으로를 강행하였고,

이에 우리의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 당국의 불법 처사를 규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 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상상을 자행하였으니!

 

! 설마!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귀를 잘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이 젖가슴이 짤리우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또한 나중에 알고 보니,

군 당국은 계획적으로 경상도 출신 제7공수병들로 구성하여

이들에게 지역감정을 충동질하였으며

더구나 이놈들을 3일씩이나 굶기고,

더더군다나 술과 흥분제를 복용시켰다 합니다.

 

시민 여러분!

너무나 경악스러운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 당국은 발포 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고장을 지키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민주시민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여러분!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국에서는 계속 허위사실 날조, 유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른 방향대로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일부에서는 우리 시민군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민군은 절대로 시민 여러분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민주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을 절대 믿어주시고, 적극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980.5.25.

시민군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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