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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 칼럼◉인량우적(因糧于敵)...적지에서 식량을 징발한다

이정랑 칼럼 | 기사입력 2022/01/28 [00:03]

이정랑 칼럼◉인량우적(因糧于敵)...적지에서 식량을 징발한다

이정랑 칼럼 | 입력 : 2022/01/28 [00:03]

인량우적(因糧于敵)...적지에서 식량을 징발한다.

 

손자병법’ ‘작전편에 보면 용병에 뛰어난 장수는 한 번 동원으로 적을 물리쳐 전쟁을 끝내지, 양식을 세 차례씩이나 운반하지 않는다. 군수 물자는 국내에서 가져다 쓰지만, 식량은 적지에서 징발해야 군대에서 먹는 것이 부족하지 않게 된다.”는 대목이 있다. 초려경략(草廬經略)’이라는 책의 식량 공급에 관한 부분을 보면 장기간 지키려면 논밭을 일궈야 하고, 곧장 진격하려면 식량 운송로를 닦아야 하며, 적진 깊숙이 들어가려면 식량을 적지에서 얻어내야 한다.”고 했다. 식량을 적지에서 징발한다는 것은 싸우면서 전력을 향상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     ©김환태

고대의 전쟁에서 후방이 주로 하는 일은 식량 운반이었다. 그래서 군사와 말이 움직이기 전에 식량이 먼저 간다는 말도 있다. 교통과 운송 장비가 낙후되어 있던 고대에 적지 깊숙이 들어가 작전을 펼치게 되면, 전선이 너무 길고 교통이 불편하기에 부대의 식량 공급을 전적으로 본국의 운송에 의존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따라서 적지에서 식량을 징발하는이 방법은 고대의 군사 전문가들에 의해 유효하게 운용되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약탈과 같은 잔인한 방법으로 군수 공급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백전기법(百戰奇法)’이라는 병서에 보면 정벌에 나서서 적진 깊숙이 들어가게 되면 식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으므로 병사를 나누어 약탈하게 해야 하는데, 창고를 점거하여 비축된 식량을 탈취, 군량으로 공급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이 방법은 현지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항전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의 삼광(三光)’정책(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태우고, 모조리 약탈한다는 세 가지 말살책)은 지극히 비인도적인 잔혹 행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중국 남북조 시기(386~589), 북주(北周)의 하약돈(賀若敦)이 상주(湘州)를 구원하는 전투에서 적지에서 양식을 징발하는 방법으로 군수 공급의 문제를 해결했다. 상주는 원래 남조 양()나라 땅이었는데, 승성(承聖) 3(554) 서위(西魏)가 강릉(江陵)을 함락시킨 후 상주와 파주(巴州)가 모두 서위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진패선(陳覇先)이 양을 대신해 황제로 자처한 지 3년이 흐른 559, 그는 후진(侯瑱) 등으로 하여 군대를 이끌고 상주의 탈환을 시도했다.

 

이에 북주의 임금 명제(明帝) 우문육(宇文毓)은 하약돈을 보내 상주를 구원케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가을비가 너무 많이 내려 강물이 넘치는 바람에 수로가 끊어졌다. 양식을 운송할 길이 없어진 상황에서 군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에 하약돈은 병사들을 보내 양식 물자를 약탈하게 하여 부대에 보충했다. 그리고 후진 군대에 양식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군영 주위에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 겉을 쌀로 덮었다. 또 부근 마을 사람들을 불러다 일부러 여기저기를 구경 시키고 이것저것을 물어본 뒤 돌려보냈다. 이들의 입을 통해 식량이 풍족하다는 것을 후진에게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다음 하약돈은 진영을 정비하고 창고를 쌓도록 하여 지구전의 양상으로 돌입했다. 하약돈은 후진과 1년간 대치했다.

 

필자 : 이정랑 언론인. 중국고전 평론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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