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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공군참모총장 노백린, 대한민국 공군의 초석이 된 장군

문해청 | 기사입력 2021/02/08 [00:04]

[인물] 공군참모총장 노백린, 대한민국 공군의 초석이 된 장군

문해청 | 입력 : 2021/02/08 [00:04]

  

▲ 노백린 장군과 항일비행사학교

 

"이 전투기 타고 일제를 쑥대밭으로 만들자"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라" - 선생의 유언 - 

 

노백린 선생(1875.1.10.~1926.1.22)은 미국에 최초 항일비행사학교를 세운 영원한 장군이고 어릴 적부터 호탕하고 기백이 남달랐던 선생은 메이지유신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군사지식을 습득하고 군사전문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역량을 길러 졸업했다. 그 후 1900년 10월 육군참위(현. 육군소위)에 임관되어 한국무관학교 보병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교관으로서 수많은 조선의 군인을 양성하였고 꾸준히 승진하여 육군무관학교장 및 헌병대장을 역임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며칠 후, 이토 히로부미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한국 측 고관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벌였다. 이 자리에 노백린 선생이 참석하게 되었는데 현장에 있던 이완용 송병준 등의 역적에게 “워리 워리”하며 개를 부르는 것 같이 불러버린 것을 역사에 전해진다. 

 

이 의미를 파악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세미치가 칼을 빼 들어 덤비려하자 노백린 선생도 칼을 빼어 대결을 하러 대응하였고 이토 히로부미가 황급히 하세가와 사령관을 말려 더 큰 화는 막았으나 연회장은 파연되고 말았다. 

 

그 후 노백린 선생은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 양기탁, 이동녕 선생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모든 걸 다 받쳤다. 1910년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은 회유와 협박으로 일본을 위해 일할 것을 선생에게 끊임없이 요구했으나 선생은 의연하게 거절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중국시찰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조명구 선생과 함께 중국으로 가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미국에 망명하게 되었는데 선생은 하와이에서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해 힘썼다. 원래 미국 내에서는 외국인의 군사활동이 허락되지 않았으나 하와이 미군 사령관이 이를 묵인해 주었다. 

 

군 시설이나 체제는 미국식으로 하며 총은 목총을 사용하여 훈련했는데, 운명처럼 나라를 빼앗긴 8월 29일에 건축물의 완성을 축하하는 의식인 낙성식을 갖게 되었다. 축하객 포함 약 600여 명은 감격과 결의로 가슴 속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 노백린 장군의 친필 자료


191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잡지 <태평양시보>를 만들고 언론을 통해 조국의 실상과 독립운동을 권장하는 활동을 했고 캘리포니아 주에서 정착을 시작했다. 그 후 선생은 군인으로 선견지명을 갖고 앞으로 전쟁은 육군보다도 공군력이 좌우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비행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지방 유지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 열의에 감동한 국민회 중앙총회 총무직을 맡고 있는 곽임대(郭林大)가 매월 600달러씩 재정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1919년 1월 2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북방 윌로우스에 기지를 건설했으며, 1920년 2월 20일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하였다. 

 

한편 곽임대의 주선으로 캘리포니아주에서 쌀의 왕으로 통하는 김종인(金鍾麟)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비행군단 창설 필요성을 역설하자 김종인은 양성소 건설에 필요한 각종 항공시설 일체를 도맡아준다는 것과 매월 3,000달러씩 경비를 지원한다고 약속했다. 

 

비행군단 조직은 김종인(金鍾麟)을 총재로 추대하고 선생은 총무로 활동하였다. 곽임대는 훈련생 감독을 맡았다. 

 

드디어 1920년 5월에는 연습용 비행기 2대와 비행사 노정민 ․ 박낙선 ․ 우병옥 ․ 오임하 ․ 이용선 ․ 이초 등 6인을 초빙하여 교관단을 양성하여 역사적인 한인비행사학교를 개교하였다. 연습 비행기는 5대로 늘어났으며 1922년 6월에는 학생수가 41명에 달하고 1923년에는 1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항공술을 배운 졸업생들은 의기가 충천하여 “도쿄로 날아가 쑥대밭을 만들자”고 호언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서 국외에서 비행사를 양성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또한 독립전쟁을 위한 항일비행군단을 조직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 군역사상 매우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평소 가족들에게 말하던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라”는 말이 유언이 되어 버린 장군은 평생 소원하던 광복을 못 본 채 뜻밖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선생에게 후학들은 깊은 애도를 드리며 나라 없음을 슬퍼하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 공군참모총장 노백린


선생은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을 만든 초대 지휘관으로 인정받으며 전국의 공군인들이 노백린 장군을 존경하고 있다. 노백린 선생의 의지는 후대로 이어졌다. 장남 노선경 선생은 만주 신흥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독립단에 가입해 활동했고, 둘째 아들 노태준 선생은 광복군 구대장(區隊長)으로 항일전선에 나섰다. 

 

딸 노순경 선생은 3•1운동에 참가해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중국에서 독립군을 지원했다. 노순경 선생의 남편 박정식 선생은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있을 때 독립군에 군자금을 댔고, 중국 하얼빈으로 건너가 직접 독립군을 치료했다. 

 

노백린 장군의 사위인 박정식 선생이 바로 대한제국군 해산에 항거하며 권총자살을 했던 박승환 선생의 아들이다. 이러한 노백린 장군의 가문이 조국을 사랑하는 의지가 결국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주춧돌이 되었다. 

 

<자료 정상규 / 정리 문해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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