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뉴스=문해청 기자] 대구이육사기념사업회(상임대표 정대호 시인)는 2022년 문단사업으로 ‘작가와 만남’을 24일 대구 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 상상홀에서 이중기 시인을 초청해 ‘시월 시에 나타난 영천 사람들’이란 주제로 경북 영천 10월 민족민중항쟁에 대한 문학이야기를 펼쳤다.
사무처장 문해청 시인 사회로 순국선열 및 이육사 시인에 대한 묵념 후 내빈을 소개했다. 이어 총무부장 고경하 시인이 이중기 시인 『영천 아리랑』시집에 실린 「임장춘」 「황보집」 시낭송을 했다.
인문학강의 참가자(존칭생략)는 상임고문 이훈, 고문 김정호, 김병길, 최봉도, 자문위원 여은경, 김창우, 시인 정대호, 이중기, 고경하, 문해청, 제갈덕주, 문홍주, 장인윤, 소설가 김산, 평통위원 김기현, 문학시민 정현영, 심준섭, 김희자, 김태훈, 노상석, 권오준 등이 참석했다.
이날 이중기 시인은 ‘10월 항쟁’은 해방공간의 음울했던 그늘 아래서 일어난 친일모리배들과 미군정의 본질을 규명해낼 수 있는 블랙박스라고 했다. 대구 10월 항쟁이 왜 일어났는가? 에 대한 질문에는 지금까지 나온 여러 연구 자료들이 충분하게 설명한다. 또한 많은 요소들이 복잡하게 개입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음은 ‘시월 시에 나타난 영천 사람들’ 강의 전문 요약이다
1945~1946년 당시 미군정으로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에 처했다. 이승만을 필두로 한 세력들은 미소공위 실패에 이어 좌우합작이 좌절된 상태다. 또한 굶주림에 허덕이는 식량난에 급기야 9.28총파업까지 직면하게 됐다. 어쩌면 이 상황이야 예정된 수순이다. 미군은 일본 할 군정을 포기시켰고 한반도 남쪽을 점령한 뒤 치안을 일본경찰에 맡겼다. 맥아더 포고령에 의해 돌아온 친일경찰에게 치안을 돌려준 것이 화근이다. 사상유래 없는 대풍년에 쌀을 ‘자유시장’ 논리에 맡기고 500만석 넘게 일본으로 밀수출한 미군정과 이승만 추종 지주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양곡을 창고에 감추자 시장에선 양식이 떨어졌다. 식량 강제수집과 배급제로 돌아섰고 전대미문 하곡공출까지 점령군이 감행했다. 하곡공출을 강제하는 과정에서 친일경찰들이 저지른 검거와 고문, 재산몰수라는 패악질의 해방세상 인권유린은 일제경찰을 능가할 정도였다. 강제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반대편에 있던 도시노동자소비자들 형편은 더욱 열악했다. 급기야 ‘기아(飢餓)시위’ ‘기민(飢民)시위’라고 불린 기이한 데모사태로 치달았다. 굶주리던 빈민아낙들이 냄비와 식기를 들고 시청으로 몰려갔다. 우선 허기나 끌 양식을 좀 달라하자, 대구시장 권영세는 “살림 사는 여편네들이 양식 단도리도 못 해 소란이냐!”고 했다.
대구는 1946년 3월 11일, 4월 1일, 7월 1일, 8월 19일 네 차례에 걸쳐 기아시위가 있었다. 수백 명, 수천 명이 부청과 도청으로 몰려가 쌀 배급을 요구했다. 또 전매국(청) 노동자들이 배고파 담뱃갑을 붙이는 풀을 먹었다. 풀에다가 염료를 섞었지만 그마저 먹어치우는 사태가 났다. 이후 토지개혁문제로 수많은 소작쟁의가 있었고, 식량공출로 시위와 봉기가 이어졌다.
그 가운데 노동자총파업 현장에서 경찰이 쏜 총에 노동자가 죽었다. 이 죽음을 목도한 대구시민들은 분노가 터졌다. 총에 맞아 사망한 노동자 ‘김용태’ 시신을 들것에 싣고 거리를 오가며 ‘시신 시위’로 이어갔다. 그 것이 바로 10월 민중항쟁 출발점이었다. 지금은 수구보수들 중심지인 대구가 ‘해방공간’ 당시 ‘좌익’ 또는 ‘진보’들 근거지였다. 이 ‘블랙코미디’는 너무 슬픈 ‘멜로’가 되고 말았다.
♠ 1946년 10월 3일, 영천 해방공간 영천을 이해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사회단체운동을 살펴 봐야한다. 1920년 ‘영천앱윗청년회’를 시작으로 1921년 ‘영천천도교청년회’ ‘영천기독교청년회’ 1925년 ‘영양청년회’ ‘영천구락부’ ‘농노회’ ‘영천군청년연맹’ 1927년 ‘영천청년동맹’ ‘신간회’ 1928년 ‘근우회’ 결성 등 많은 단체가 있다. 시기 별로 새로운 조직에서 활동했던 백기호, 김석천, 김은한, 김석인, 임장춘. 공갑룡(공의권), 차치준, 김성수, 하수득, 조상호, 백신애, 김순혜, 김영선, 차목삼 같은 인물들이 있다. 미미했지만 ‘조선공산당’도 있었다.
당시 영천 청년들이 활동했던 ‘청년동맹’ ‘신간회’ ‘기자동맹’ 등 사회단체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은 ‘천도교’ 구파 및 ‘사회주의자’들이다. 소설가 백신애 오빠 백기호, 정시명은 ML파 사상단체인 ‘정우회’에 참가했다. 1926년 백기호는 ‘조선공산당’ 2차 검거 때 영천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됐다. 1927년 8월 ‘고려공청경북위원회’를 설립하고 영천 ‘야체이카’(지방조직)로 김석천을 선정한다. 영천‘야체이카’는 ‘영천청년동맹’ ‘신간회’를 지도하는 역할을 했다. 1928년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정시명, 김석천이 검거되고 공갑룡은 도주했다가 1929년에 검거된다. 그러나 이들 중 절반에 가까운 인물들이 해방공간까지 살아남아서 10월 민중항쟁을 주도했다.
다음은 해방공간의 영천 정치세력이다. ‘우익단체’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고작이었다. 절대적으로 우세했던 좌익단체는 해방과 동시에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10월 25일 ‘경북인민위원회’ 결성 전 조직된 ‘영천인민위원회’ ‘농민조합’ ‘조선민주주의청년동맹’이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농민조합’ ‘조선민주주의청년동맹’ 이들 4개 단체는 1945년 11월 영천향교에서 정시명을 제주로 ‘혁명순국열사추도제’를 올리면서 민족민중운동에서 정통성을 계승하고 군민들로 그 권위를 승인 받았음을 공포했다. 그러나 미군정에 의해 군사단체로 지목당한 금호면의 ‘의우단’ 또 미군정이 사설 무장단체라고 해산 명령과 동시에 무기를 소지한 혐의로 대장과 군사부장에게 체포령을 내린 ‘국군준비대’가 존재했다.
해방공간 영천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임고면에서 문예공연단을 만들어 마을마다 돌아가며 연극공연을 하며 민중을 조직했다. 이 일을 주도한 인물이 입북한 시인 ‘정희준’이다. 정희준은 연희전문대학 시절에 ≪三四文學≫ 창간호에 참여했다. 1937년에 시집 흐린 날의 고민을 펴낸 후 ‘한글학회’에서 일했다. 해방 후 일제 때 면장을 했지만, 면민들 추대로 인민위원장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뜻에 따라 낙향했다. ‘정희준’ 어머니 황보성은 친정이 ‘별곡’이라고도 불렸던 ‘구전리’라 ‘별곡댁’으로 불렸는데 ‘황보집’ 집안이다.
당시 인구 15만 5천 명 정도였던 영천이 10월 민중항쟁에서 6만 명이나 봉기한 데에는 인민위원회 뒤에 숨은 실력자 몇몇(황보집, 정시명, 임장춘, 조희림)과 그들을 극렬 지지했던 ‘농민조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들 실력자들은 대부분 ‘지주’ 아들로 ‘일본 유학파’이면서 ‘조선공산당’ 소속이다. 특히 황보집(본명 황보욱)은 ‘영천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구전리’ 천석꾼 아들로 일제강점기 고향 마을에 학교를 세웠다. 1946년 10월 당시 ‘민성일보’ 편집국장(혹은 주필)으로 있었다.
‘정시명’(본명 정용식)은 ‘황보집’과 메이지대학 동기이다. 그들은 촌수가 가까운 처남남매지간으로 해방 후 ‘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또 ‘대구정치학교’ 교장, 10월 민중항쟁 당시 ‘경북인민위원회’ 노동부장이다. ‘경북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이던 조희림도 있다. ‘임장춘’(본명 임영보)은 우에노대학 성악을 전공한 인물이다. 그는 ‘영천인민위원장’으로 감동적 연설을 한 선동가이다. ‘김상문’은 ‘지주’ 아들로 해방 후 ‘운암야학교’ 교장이다. 그는 10월 민중항쟁 전략을 세웠고 제자들을 전면에 나서게 한 장본인이다.
영천 10월 민중항쟁의 배경에서 중요한 부분은 ‘지주’와 ‘소작인’ 문제다. 일제강점기부터 영천에는 “땅 부자는 이(李) 부자, 돈 부자는 백(白) 부자”란 말과 “선 자리에서 내 땅 한 자취 안 밟고는 열 걸음도 못 간다”는 말이 있다. 이 둘 중 백 부자는 소설가 ‘백신애’ 아버지 ‘백내유’를 가리키고, 다른 사람은 속칭 ‘가죽풍구’로 불렸던 ‘이인석’이다.
‘이인석’은 1923년 군수 ‘장윤규’가 영천 유지 80여 명을 규합해 만든 ‘내선친화회(內鮮親和會)’란 특수단체 회장이다. 그들은 “끼니때마다 고등어 껍질로 밥을 싸먹었다”는 말은 아직도 회자된다. 영천 14개 면 골골마다 두루 워낙 많은 토지를 가진 터여서 어느 누구라도 선 자리에서 ‘가죽풍구’ 땅을 한 자취 안 밟고는 열 걸음도 못 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영천에서 ‘농민조합’ 숫자는 3만 명에 가까웠다. 회원 대부분이 ‘소작인’과 ‘머슴’들로 그 중 절대다수가 ‘가죽풍구’이인석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다.
1945년 가을, 영천 농민들도 대풍년을 맞았다. 그런데 그해 겨울이 깊어지면서 농민들에게 “한 사람당 나락 4말 5되씩만 남기고 공출하라”고 ‘미군정’이 불벼락 쳤다. 시장에서 “최고가격 375원으로 정해놓은 쌀을 150원에 공출하라”고 강제했다. “자진공출하지 않으면 120원에 압수 뒤 군정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협박했다. 그렇게 해서 미군정이 발표했던 ‘미곡의 자유시장’정책은 ‘공출제’와 ‘배급제’로 돌아섰다. 일제경찰도 하지 못한 ‘하곡공출’을 강행하는 사태가 됐다. 당시 하곡공출과정에 ‘영천군수’는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차라리 일본놈들 밑이 나았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양식도 모자라는데 공출하지 않는다고 군청 식량계원이 왔다. 동네사람을 불러내어 두 줄로 마주세우고 서로 뺨을 때리게 했다. 트럭에 싣고 가 유치장에 가둔 뒤 운임 10원과 유치장 숙박료 90원을 뜯어냈다. 당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에서 “보리는 내놓을 테니, 가을까지 먹을 건 남기겠다” 했다. 이때 나머지를 공출하며 석유, 비누, 광목, 신발 같은 생필품을 달라고 했지만 미군정은 거부했다.
‘영천농민조합’에서는 매일 군청으로 가서 영천만이라도 그 요구를 들어달라고 사정하는 과정에서 간부들 14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 결과 영천은 공출실적이 경북에서 1등이었고, 경북은 전국에서 가장 악랄하게 공출을 했다고 ‘박헌영’은 「十月 人民抗爭」에서 밝히고 있다.
1946년 10월 3일 중양절, 새벽 1시를 기해 경찰서와 군청을 동시에 습격하면서 ‘영천 민중항쟁’은 시작됐다. 10월 ‘대구 민중항쟁’과 달리 10월 ‘영천 민중항쟁’은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거사였다. 증언에 의하면 10월 3일 새벽 1시 이전에 대구에서 ‘정시명’의 주도로 총을 든 40여 명이 트럭을 타고 경북 영천으로 달려갔는데, 그 시점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인위원회’와 ‘농민조합’은 밤 12시를 전후해서 영천 읍내 전역을 호별 방문해 “군청에서 쌀을 나눠준다는 거짓선전”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그 시각, 군수 ‘이태수’는 거사 계획을 염탐해서 달려온 군청직원과 관사에서 도망을 치다가 미리 포진해 있던 인민위회 몽둥이에 맞아 죽는다. 그 시각, ‘인민위원회’가 경찰서장 관사를, ‘농민조합’은 읍내 동문거리에 있는 ‘가죽풍구’ ‘이인석’ 집을 동시에 덮쳤다. 하지만 경찰서장은 종적이 묘연했다. ‘가죽풍구’‘이인석’은 영천 임고면 호화저택에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경찰서, 군청, 신한공사출장소, 등기소, 우편국에 배치해 둔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원’들이 일제히 ‘전화선’을 끊었다. 2천명 군중들이 경찰서와 군청을 습격했을 때, 총성 몇 발만 울렸을 뿐 경찰은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이어 등기소, 신한공사, 우편국이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경찰무장을 해제시키자 읍내는 ‘해방구’가 되었다. 날이 밝기 전에 ‘인민위원회’ ‘농민조합’은 대구에서 온 ‘조선공산당원’들과 함께 각 면으로 분산해 배치했다.
먼저 ‘임장춘’의 대오가 임고면사무소, 지서를 점령한 뒤 ‘가죽풍구’ ‘이인석’ 호화저택 ‘송호정’을 염매시장어물전 상인들이 주축 되어 화북면을 장악 후 도청 관리였던 ‘정도영’ 저택을 불태웠다. 이 두 저택은 영천 10월 항쟁의 상징이다. 한 곳은 행랑방이 딸린 솟을대문만 남은 채로 방치되었고, 다른 한 곳은 철저하게 외부인들의 출입을 차단되어 있다.
영천항쟁은 거기까지만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거사’일 뿐이다. 이후, 지휘부가 없는 읍내는 ‘장삼이사’들의 보복과 응징으로 이어졌다. 특히 ‘징용패’들 보복이 심했다. 그러나 당연히, 당해야 할 사람들만 당했다. 일제 앞잡이로 공출을 다그치다가 해방공간에서 더 악랄하게 하곡공출을 닦달하던 경찰과 군청 직원들 집에서 쌀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이에 그들을 응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준비된 영천항쟁의 공격 대상은 군수, 경찰, 지주였다. 모든 면사무소와 지서를 점령하면서 그 중 6개 면사무소가 불탔고 9개 지서를 파괴했다. 보고서마다 내용이 다르지만 경찰 8명과 군청직원 8명 사망에 중상자 19명, 지주와 우익 등 사망 24명에 중상 20명, 경찰서와 각 지서 무기를 전부 탈취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10월 4일 오후 3시에 ‘미군전술부대’ 1개 대대, 6시 무렵 경찰 100명이 도착하며 주민에 대한 테러가 시작된다. 뒤이어 충청도, 전라도 응원경찰이 증파되고 인종청소기 ‘서북청년단’이 오면서 무자비한 체포와 살인으로 이어진다. 한 마을에서 40 명이나 과부를 만들어 놓는 바람에 영천 사람들은 ‘서북청년단’을 ‘벼락부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서북청년단’을 훈련시켜 철모에 ‘인등구리’를 새겨 넣은 ‘호림부대’를 투입해 ‘빨갱이’란 명목으로 마구잡이 연행해 돈을 들고 오면 풀어주는 만행을 지루하게 했다. 그런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몸을 피했다가 달밤에 돌아와 밭을 갈고 씨앗을 넣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빨치산’ 산사람이 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제노사이드이면서 홀로코스트인 국민보도연맹 1950년. 경북 영천은 인민군 ‘9월 공세’ 격전장이었다. 영천전투 앞뒤로 대량학살이 진행되었다. ‘보도연맹원’이 없지는 않았으나 대부분 ‘관제빨갱이’로 몰린 ‘양민’들이었다. 전선이 급격하게 남쪽으로 무너지자 먼저 ‘가지골’에서 43명이 죽임을 당했다. ‘절골’에서는 200명이 그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비명에 갔다. ‘화북’에서도 150명이 쓰러졌다. ‘아작골’에서 300명쯤 처분 또 처분, 살처분이 됐다. 그 시기, 영천에서 ‘월북자’ 303명이 있었다고 ‘국가기록원’ 기록은 전한다. 그중에서 103명은 이름이 지워져 있다.
경찰에게 가족이 학살당한 사람들, 그래서 경찰에게 저항했던 사람들, 꾸역꾸역 ‘월북자’ 명단에 올랐으리라. 전선이 북쪽으로 이동한 뒤에도 ‘월북’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주장도 있다. 정말 그 사람들이 냉담하게 남녘을 버리고 북녘으로 갔을까? 어느 골짜기 어느 골에서 소문 없이 살처분을 당하고 슬그머니 월북자 명단에 끼우지는 않았을까?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미친 권력의 손바닥은 아직도 영천 사람들에게 눈을 가리고 있다.
1946년 10월, 조선대륙(북녘남녘)에서 ‘빨갱이’란 일제경찰이 해방 전 ‘독립군’을 지칭했던 말이다. 10월 민중항쟁은 맥아더 포고령 위반일 뿐이다. 당시 ‘조선공산당’이 큰길에 사무실을 얻어 간판 걸고 활동하던 시대였다. ‘정치는 생물’이란 말이 옳다면, 동태 눈깔처럼 맛이 간 ‘친일파’가 아니라 물때 좋은 ‘인민위원회’야말로 최고의 생물이 아닌가.
꿈같은 해방공동체가 만들어졌으나 그 공동체를 산산이 부숴버린 채, 퇴로까지 차단해버리고 불구덩이로 뛰어든 ‘친일관료’와 ‘장군의 정부’에 대한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다. 거친 밥 한 그릇이 간절했던 ‘인민’들은 ‘냉전’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다만 하나, “내 밥그릇 빼앗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였으며, 생존을 위한 최소한 ‘몸부림’이다.
그러니까 ‘10월 민중항쟁’은 ‘좌우대결’이 아니었다. 미군정반대 구호 하나 없는 ‘식량 투쟁’이었건만 ‘친일파’와 ‘미군정’이 빨갱이로 몰아 단죄를 했다. 이를 ‘폭동’이고 ‘반란’이라고 정당화했다. 친일파와 미군정이 찍은 낙인은 ‘제주 4.3 민중항쟁’원조였고, ‘거창양민학살’ 본적지가 바로 ‘영천’이었다. 그렇게 ‘10월 학살’은 지루하게 1953년 9월까지 전국에서 자행됐다. 대구가 ‘식량 투쟁’이라면, 영천은 ‘공출 거부투쟁’이다.
이중기 시인은 “10월 대구 민중항쟁이 ‘우발적’이고, 10월 영천 민중항쟁은 ‘계획적’이라 그 성격이 다르다” “대구 민중항쟁은 파업 중 노동자가 경찰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한 군중들이 분노한 우발적 행동이다.‘민란’에 가까웠다” “영천항쟁은 공출거부를 위한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의 계획된 행동이라 ‘반란’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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