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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한자.청동기문명을 일으킨 상나라는 한민족 국가였다!

상나라는 주나라에게 망한 후에 기자유민이 요서지역으로 이주하여 기자조선이 되었다

윤복현 | 기사입력 2023/07/24 [00:03]

차이나 한자.청동기문명을 일으킨 상나라는 한민족 국가였다!

상나라는 주나라에게 망한 후에 기자유민이 요서지역으로 이주하여 기자조선이 되었다

윤복현 | 입력 : 2023/07/24 [00:03]

상나라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실존했다고 인정받는 차이나 최초의 한민족 국가입니다. 마지막 도읍이 차이나 하남성 안양시의 은(殷)이었기 때문에 은나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상나라는 19세기 말까지 전설상의 왕조로 여겼으나 20세기 초에 안양시 외곽의 은허(殷墟)가 발굴되고 상나라의 대소사를 기록한 갑골문을 새긴 복갑들과 청동기 등 상나라 시대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실존했던 나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상나라는 갑골문자를 창조하고 청동기문화를 꽃피움으로써 중국의 첫 문명시대를 열고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차이나학계는 여러 문헌기록을 근거로 상나라의 시조 설이 한민족족이 건설한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적봉시 일대에 살았으며, 상토(설로부터 3대) 때 상족의 활동무대를 발해연안 일대로 보고 있습니다.

치이나의 저명한 고고학자 소병기(蘇秉琦)는 “은(상)의 조상은 남으로는 연산(燕山)에서 북으로는 백산흑수(백두산과 흑룡강)까지 이른다”고 단언했습니다. 안양현 은허(殷墟) 유적의 발굴조사를 총지휘했던 부사년(傅斯年)은 일찍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고 주장했다. 이런 부사년의 견해는 상나라가 멸망한 후 기자 집단이 고조선으로 이동한 사실과도 일치합니다.

 

 

 

 

▲ 상나라 은허유적지에서 출토된 한국인 얼굴의 청동인면구  

 

 

 

 

 

상나라는 홍산문명을 건설한 한민족의 일부가 황하지역으로 남하하여 건국한 우리나라였습니다. 우리 한민족이 사물의 모양을 본떠 만든 갑골문자가 변형되어 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상나라 사람들이 사용한 갑골문자의 발음이 지금 우리가 사용한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이는 상나라가 한민족 나라였다는 부정할 수 없는 언어학적 증거이고, 한민족은 3을 중시한 민족인데 상나라의 3족 청동기가 상나라가 한민족 나라임을 증거하는 고고학적 유물입니다.

 한민족의 3신1체 하나님을 상징하는 3족발의 상나라의 청동유물들

상나라 사람들은 거북이 등으로 점을 쳤는데 이는 상나라 달력을 사용한 부여도 같았습니다. 상나라와 부여는 한민족 나라들임을 증명합니다. 주나라에 망한 후 상나라 유민들은 대거 조상들의 고향인 동북지역으로 이주하여 고조선의 번국으로써 지금의 요서지역에 기자조선을 형성했습니다. 이때 기자는 상나라 멸망당시 상나라 왕족 기자를 의미합니다.


기자의 7대 후손 기후 때에 의병을 일으켜 연나라 침략을 물리치고 고조선의 중심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만주의 단제에게 부단제로 임명받아서 고조선 서토를 다스리는 권좌에 오르는 것입니다.그리고 기준을 마지막으로 기자조선은 위만에게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민족 정통사서[환단고기/단군세기]에 기록된 기자후손 기후와 기자조선,부여와 고구려

 

 

 

"46세 단군 보을, 경진 원년(BC 341), 번조선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오가五加가 다투어 일어났다.무술 19년(BC 323), 정월에 읍차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하여 번조선 왕이라고 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를 구함에 이를 허락 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 기록내용에서 '읍차'는 기후의 관직명을 말한다. 13세 흘달 단군조에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9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하니 은나라의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읍차는 군대를 통솔하는 장군의 직책으로 보입니다.

 

 

 

 

 

이 당시 기후는 이미 읍차라는 관직명을 가지고 번조선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 대목이 소위 기자세력이 번조선왕으로서 우리 역사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인데 <환단고기><태백일사>에 그 전후사정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중략) 병오년에 아들 가색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경진년에 아들 해인이 즉위하였다. 일명 산한이라고 했는데 이 해 자객의 시해를 당했다. 신사년에 아들 수한이 즉위했다. 임오년에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안촌골을 공격했다. 또 험독에서도 노략질을 하니 수유의 사람 기후가 자식과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 싸움을 도왔습니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진, 번 2한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연나라 서울)의 남쪽에서도 싸우려 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공자를 인질로 삼았다”

 

 

 

"을축 46년(BC 296), 한개韓介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 부수었다. 단제께서는 서울로 돌아 오셔서 대사령을 내리셨는데 이 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수 없었다,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후사가 없음에 고열가가 단군 물리의 현손으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지라 마침내 즉위 하였다."

 

 

 

은나라가 패망후에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은나라 왕족인 기자의 이름을 서여라고 합니다. 여기서 수유는 기자세력을 지칭합니다. 고조선의 번국으로 지금의 요서지역을 다스리던 번조선의 지배권을 기자세력이 장악하고 마침내 단군 보을이 다스리는 진조선의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고 단군의 지배하에 있던 각지의 제후국들이 세력을 얻게 됨에 따라서 단군조선의 국운은 점차 쇠약해져 갔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규원사화]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고열가 임금이 입하매 국용이 부족하여 봉가(단군 8가의 하나)가 경기지방 고을에서 부세를 거둬들여 겨우 유지하다.....임금이 제가와 상의해 가로대 지금 왕실은 쇠미하고 권신들은 더욱 강성하고 제후들은 명을 받드는 자 거의 없다 하시니라....”

 

 

 

 

 

고조선은 48대 고열가 단군을 마지막으로 멸망한 것으로 국사교과서에는 기록되어있으나 이는 잘못된 역사기록입니다. 고열가 단군이 권좌를 버리고 옛 평양성으로 떠나자, 고조선의 황족인 고리족 출신의 해모수가 군대를 일으켜 5가의 추대를 받아서 고조선의 권력을 계승하니 광개토태왕비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고구려의 시작인 북부여입니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다시 만주로 군대를 몰아 부여를 멸망시키려고할 때 의병을 모아서 한나라 침략을 물리치고 고리족의 땅이였던 서요하지역에 위치한 서안평(임황지역)까지 회복하고 부여민심을 얻어 부여 단군에 즉위한 인물이 바로 고추모와 재혼하여 고구려를 열었던 소서노 부여공주의 할아버지인 동명왕 고두막 한(칸-왕)입니다.

 

 

 

 

동명왕 고두막이 부여단군에 즉위하자, 해모수의 손자이면서 당시 부여단군이였던 해부루가 부여권좌를 고두막에 양위하고 바다지역으로 이주하여 세운 부여의 제후국이 동부여입니다. 고구려 국조 고추모는 해모수의 직계 손자로서 해모수의 차남인 고진의 손자인 고모수(불리지)의 아들입니다.

 

 

 

 

이 동부여의 왕궁에서 금와왕의 보호아래 고추모가 성장하였지만 금와왕의 자식들의 시기 질투 박해를 피하여 부여로 망명하여 남편과 사별한 부여공주 소서노와 재혼하여 부여 단군에 즉위하여 국호를 자신 조상들의 나라이름인 고리(코리=고려=고구려)로 바꾼 것입니다. 고조선 단제들은 성씨가 해(고)씨였기 때문에 고추모 역시 단제의 후손인 것입니다.그래서 고추모를 단군의 아들로 사료에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조선를 계승한 부여가 고구려이고 고구려의 국시가 바로 고조선의 모든 영토와 고조선족을 모두 통합하겠다는 다물이였기때문에 고조선의 영토였던 요서지역과 차이나 동해안지역을 모두 회복하고 다스린 것입니다. 광개토태왕 당시는 고구려를 대적할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북위왕이 장수태왕이 죽자, 궁궐지붕에 올라가 예를 갖추었다는 사실은 북위가 고구려 제후국이였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고구려인과 혼인한 북위왕조는 고구려세력이 지배한 왕조였기도 했습니다. 광개토태왕이 고구려 54만을 데리고 초원으로 이주하자 북위가 수도를 업으로 천도했다는 북위사료는 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이 최강이였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현재 황하상류지역에 존재하는 영락궁은 명나라 영락제 이전의 유적지로 아마도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광개토태왕 당시 지은 궁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멸망 후 대진국 발해를 건국한 대야발 직계후손인 징기스한이 유라시아대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한류가 확산되고 있어 한국과 경제.문화협력공동체를 실현해야하는 중앙아시아지역의 한민족 투르크 나라들  © 윤복현


 

 

그리고 고구려가 망한 후 연개소문의 차남 연남산은 당나라를 탈출하여 카자흐스탄에서 예맥한국을 세웠고, 고구려 마지막 보장태왕의 손자가 돌궐황제 묵철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고구려왕족 해.고씨는 고구려유민 20만을 이끌고 돌궐로 합류 후 돌궐권력집단이 되어 서진하면서 중앙아시아에 수 많은 고구려계 투르크 나라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셀주크투르크가 몽골에게 망한 후 흩어진 투르크세력을 모아서 아나토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와 동유럽지역을 지배한 광대한 오스만제국을 건설한 주역이 바로 고구려왕족 성씨인 해(하이=카이)씨를 사용했던 고구려왕족의 후예였습니다.

 

 

 

 

 

 

 


동부여에서 아버지 고추모를 찾아온 유리왕때문에 고구려 왕위에서 밀려난 비류.온조는 소서노를 따라서 대방고지에서 대륙백제의 기반이 되는 어하라를 건국하였고 온조는 신하 10명과 추종세력을 데리고 배를 타고 마한(한반도)으로 이주하여 한강지역에 십제를 건국합니다.

 

 

 

 

 

이후 비류가 죽자 비류세력이 십제로 합류하고 십제의 왕권을 차지하고 차이나대륙의 부여세력과 함께 차이나 동해안지역을 회복하여 다스리게 됩니다. 부여에서 나온 고구려와 백제는 차이나 동해안지역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우다가 결국 고구려 문자태왕 때 백제군을 폐하면서 고구려가 차이나 동해안지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 분명히 그러한 배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산월.좌월이 있었다. 문자태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회계.오월.좌월.산월.천주라 했다.문자태왕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오늘날 '홍콩지역'에 해당하는 '천주'지역에 신라관련 지명이 많은 연유라 할 것입니다. 고구려 문자태왕이 홍콩지역으로 신라인들을 강제 이주시켜 살게 한 이후로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는 지역이 되었다로 이해해야 올바른 이해라 할 것입니다.따라서 홍콩지역에 신라인들의 무덤이나 유적.유물.지명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신대 신학과 졸업
부천YMCA 중.고등부 교사
육군 3사단 백골부대 병장 전역
한신대 신학대학원 졸업(석사논문:한민족의 하느님신앙과 종교다원적 상황의 선교적 과제)
역사.종교연구가/심리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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