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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굴종 모습 담긴 최치원이 쓴 양위표(3)

진성여왕은 897년 6월 보위를 물려준후 12월에 세상을 하직하다

하태형 고전 칼럼 | 기사입력 2012/05/20 [06:01]

신라의 굴종 모습 담긴 최치원이 쓴 양위표(3)

진성여왕은 897년 6월 보위를 물려준후 12월에 세상을 하직하다

하태형 고전 칼럼 | 입력 : 2012/05/20 [06:01]
▲ 최치원 선생
오늘은 <양위표(讓位表)>의 마지막 단락을 아래와 같이 소개드립니다.

4. 竊以臣姪男嶢。是臣亡兄晸息。年將志學。器可興宗。山下出泉。蒙能養正。丘中有李。衆亦思賢。不假外求。爰從內擧。近已俾權蕃寄。用靖國災。然屬蟻至壞堤。蝗猶蔽境。熱無以濯。溺未能援。帑廩一空。津途四塞。槎不來於八月。路猶敻於九天。不獲早託梯航。上聞旒扆。雖唐虞光被。無憂後至之誅。奈蠻夷寇多。久阻遄征之使。禮實乖闕。情莫遑寧。臣每思量力而行。輒遂奉身而退。自開自落。竊媿狂花。匪劉匪雕。聊全朽木。所顗恩無虛受。位得實歸。旣睽分東顧之憂。空切咏西歸之什。謹因當國賀正使某官入朝。附表陳讓以聞。

삼가 생각건대, 신의 조카인 요(嶢: 훗날 효공왕(孝恭王))는 신의 죽은 오라비 정(晸)의 아들인데,나이 15세(志學)가 되어, 그 그릇이 종실(宗室)을 일으킬 만합니다. (<주역(周易>의 <몽괘(蒙卦)>에서 말한 바) ‘산 아래에서 샘물이 솟아 나오듯(山下出泉) 어려서부터 점차 바르게 교양되었기에(蒙能養正)’,(<시경(詩經)>에서 말한바) ‘언덕 가운데 오얏이 있는 것처럼(丘中有李)’ 사람들이 또한 어진 그를 사모하였습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굳이 구할 것이 없이 바로 내부에서 천거하기로 하고는,그로 하여금 임시로 번기(藩寄: 제후의 직책)를 맡겨, 국가의 재난을 진정시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비자(韓非子)>에서 말하는바) ‘개미(蟻) 떼가 제방을 무너뜨리고(蟻至壞堤)’, 메뚜기(蝗) 떼가 국경을 뒤덮고 있으니(蝗猶蔽境),(<맹자(孟子).이루상(離婁上)>에서 말하는 바) ‘백성들이 신열이 나도 물로 씻어줄 수 없고(熱無以濯), 물에 빠져도 건져줄 수 없는(溺未能援)’ 지경입니다.

모든 국고와 창고는 한결같이 비어 있고(帑廩一空),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에 나오는 표현처럼) 실로, ‘나루로 통하는 길은 사방으로 막혀 있습니다(津途四塞)’. (<박물지(博物志)>에 적혀있는 전설에 의하면, ‘매년 8월, 어떤 사람이 뗏목을 타고 은하수를 통해 오가며 소식을 전한다’고 하는데), 그런 ‘8월의 뗏목(八月槎)’도 오지않고, 황상이 계시는 구중천(九重天)까지의 길은 까마득히 머니,일찍이 체항(梯航: 사닥다리를 놓고 산에 오르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는 뜻으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먼 곳을 감을 이르는 말)에 의탁하여 황상께 고해 올리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경(書經)>에 기록된바) 비록 요(唐堯)임금과 순(虞舜)임금시대 치세(治世)의 ‘빛남이 사방을 입히신다(光被四表)’라고 하였지만, 훗날 (공공(共工), 환두(驩兜)등 반대세력을) 처벌한 후에야 비로소 근심이 사라졌으니, 하물며 (저희 나라같이) 오랑캐및 도적떼가 들끓고, 게다가 사신을 급파할 길이 막힌지 오래이면, 어찌 예의범절과 실제생활이 괴리를 보이지 않을수 있겠으며(禮實乖闕), 사정이 어찌 한가로울 수가 있겠습니까(情莫遑寧)?

신이 역량을 헤아려 행동해야 한다고 매번 생각하다가,이번에 마침내 몸을 받들어 물러나기로 하였습니다. 혼자 피었다가 혼자 지는 광화(狂花: 때에 맞지 않게 피는 꽃)와 같이 삼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만,
깎을 수도 없고 새길 수도 없는 후목(朽木)으로나마 온전히 생을 마쳤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오직 신이 바라는 바는, (황상으로부터 받는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여,보위가 (적임자에게) 돌아갔으면 하는 바램 뿐입니다. 동방을 돌아보시는 황상의 근심을 나누는 직분을 이미 등지게 되었기에(睽分東顧之憂),
서쪽으로 중국에 귀의하는 시를 속절없이 읊을 따름입니다(空切咏西歸之什). 삼가 본국의 하정사(賀正使) 모관(某官)이 입조하는 편에 양위하는 표문을 함께 부쳐 아뢰는 바입니다.

姪: 조카 질 息: 자식 식 蒙: 어릴 몽 俾: 시킬 비 靖: 평안할 정 劉: 칼 유 顗: 근엄할 의 睽: 등질 규

이 마지막 단락 또한 앞 단락들 같이, 한구절 한구절의 표현이 전고(典故)가 없는 표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최고의 품격을 지닌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문장의 내용은, 당시 통일신라말기,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대적 상황을 비교적 솔직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나라곳곳에서 민란및 도적들의 봉기가 일어나,당나라로 가는 교통편마저 두절되어 있는 상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설명은 간략히 본문에서 소개드렸습니다만,다만 ‘혼자 피었다가 혼자 지는 광화(狂花)와 같이 삼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만, 깎을 수도 없고 새길 수도 없는 후목(朽木)으로나마 온전히 생을 마쳤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自開自落。竊媿狂花。匪劉匪雕。聊全朽木)’라는 부분은 약간의 설명이 추가로 필요할 것 같습니다.

먼저, ‘광화(狂花)’란, 남송(南宋) 왕십붕(王十朋)의 주석에 의하면,‘역사책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꽃이 때에 맞지 않게 피는 것, 예컨데 복숭아꽃이 겨울에 피는 경우를 말한다(狂花,在史所載,花不以時開,如桃李冬花者,謂之狂花。)’라고 하고 있습니다.

최치원은 여기서 ‘꽃(花)’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여왕(女王)’의 이미지를 대변하되,‘혼자 피었다가 혼자 진다(自開自落)’라는 표현을 덧붙여, ‘제대로 당나라의 승인도 받지 않고 보위에 올랐다가 또한 당나라의 사전양해 없이 제멋대로 보위에서 물러나는’ 진성여왕을 당나라적 관점에서 표현한 후,‘광화(狂花: 미친 꽃)와 같아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竊媿狂花)’ 는 표현으로 당나라의 양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구절은 ‘후목(朽木)’이란 단어가 Key Word인데, <논어(論語).공야장(公冶長)>편에 공자께서 제자인 재여(宰予)를 심하게 책망하는 구절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재여가 낮잠을 자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가 없고, 거름흙으로 쌓은 담은 흙손질 할 수가 없다.내 재여에 대하여 더 꾸짖을 일이 있겠는가?” 하셨다.(宰予晝寢. 子曰: "朽木不可雕也, 糞土之牆不可杇也; 於予與何誅?")

즉, 진성여왕 자신은 공자님의 꾸중처럼 ‘더 이상 깎을 수도 없고 새길 수도 없는 썩은 나무(朽木)같은 쓸모없는 존재이니, 다만 바라는 것은 썩은 나무(朽木)로나마 온전히 생을 마쳤으면 한다’는 의사를 ‘匪劉匪雕。聊全朽木(비유비조 료전후목)’의 여덟글자에 담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병마에 시달리던 진성여왕은 897년 6월 보위를 물려주고 난뒤, 12월에 세상을 하직합니다.

이상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문중 하나인 <양위표(讓位表)>를 살펴보았습니다.
<하태형/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장/경제학박사(뉴욕주립대)/금감위 자문위원/고전(古典)컬럼니스트/서울대 경영대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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