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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5.18을 통하여 정동영 그를 엿보다

처음 가는 5.18 광주를 정동영의원 지지자들과 함께-

박정례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2/05/22 [05:54]

동행,,5.18을 통하여 정동영 그를 엿보다

처음 가는 5.18 광주를 정동영의원 지지자들과 함께-

박정례 칼럼니스트 | 입력 : 2012/05/22 [05:54]

우리에게 5.18은 무엇일까? 5.18은 희망이며 행동하는 양심이고 시대를 선도하는 참다운 정신이다. 참세상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바로미터이며 대동정신을 구현하고 민족이 하나 되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들꽃처럼 만발하도록’ 일깨워주는 화해와 상생의 위대한 상징이다. 5.18은 이 같이 민주, 평화, 정의, 상생, 대동사회 등을 함의하는 선명한 기호이다.
 
5.17일 날 광주에 갔다. 한 경제연구소에 발을 담그고 있었던 지라 세미나 차 서너 번 간곳이었다. 하지만 5.18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망월동에 참배를 간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구체적인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 한 혼자 가기란 그리도 용의치 않은 현실이었다. 마음 한 구석에는 늘 5.18 영령들에게 빚을 진 사람마냥 부채의식을 떨치지 못하던 터였다. 벌써 32년째를 맞는 기념식이 아닌가?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이 망월동 참배를 떠난다는 소식에 반색을 했다. ‘와, 괜찮다! 개인적으로 가려면 돈 10만원 깨지는 거 순식간인데 회비 3만원이면 해결된다고 했다. 이번 기회에 얼른 따라붙으면 될 것 같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일반고속을 타려니 해도 뜻대로 안 된다. 우등고속의 운행횟수가 월등하게 많은 이유다. 택시비용이며 식비 등 부대비용 들어 가는 것까지 치면 여행경비는 늘 예상한 것 보다 더 든다. 휴우~ 걸림돌이 많은 세상이다.

 5.18 기념식 간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이 더 적극적이었다. 열 일 제치고 갈 테니 광주에 갈 수 있도록 주선해 달란다. 생각만 하다가 날 샐 뻔 했다. 그러나 옆에서 서두르는 사람이 있어서 2인 회비를 지체 없이 입금시켰다. 출발 시간은 덕수궁 앞 대한문에서 6시라 했다. 시간 맞춰가려면 택시 아니면 자가용으로 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첫차가 5:30분인 전철로는 출발시간에 맞게 도착할 계산이 안 나왔다. 결국 아들이 나서서 출발장소까지 데려다 줬다.
 


차량 두 대가 시동을 걸어 놓고 있었다. 6시 15분쯤 차는 먼저 강남 터미널로 향했다. 일행 일부를 태우기 위해서였다. 이어서 신갈정류장에서 나머지 인원까지 전원 탑승을 시켰다. 차는 빠르게 달렸고, 정안휴게소에서 15분가량 정차 시간을 가졌다. 급한 용무가 있으면 해결하라는 것이리라. 이때 앞차에 있던 정동영의원이 우리가 있는 차로 옮겨 탔다. 나머지 시간을 광주까지 동승할 모양이었다. 그런데 출발 당시에 지급받았던 김밥과 떡을 뒤늦게 꺼내 들고 먹기 시작했다.

“앞차에는 우리가 먹은 김밥이 없었나? 아니면 여기서 또 드시는 건가?”
“정의원님은 주무시느라 앞차에서는 아무 것도 안 드셨대요.” 하고 뒤에서 말해줬다.
“아~ 그렇구나!”
 
정의원님의 밥 먹는 모습, 전에도 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은 밥상에 놓인 반찬을 무척이나 골고루 맛보는 모습과 서두르지 않고 꼭꼭 씹어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팔도 음식들, 저 양반을 보면 무척이나 반기겠네.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어줘서!" 오늘도 보니 여전히 차분한 모습으로 김밥에 이어 떡 한 덩이를 들고 꼭꼭 씹어 먹는 게 눈에 들어왔다.
 


광주시에 진입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때 맞춰 정동영 의원이 가방에서 넥타이를 꺼내어 매고 의관을 다듬고 있었다. 드디어 광주에 도착했구나. 3시간 반 동안 부지런히 달린 결과다.

망월동에 도착하자 정동영 의원을 반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는 추세였다. 망월동 유족회장도 뛰어나와 반기며 기념식장으로 안내를 한다. 하얀 장갑을 받아 쥐고서 정동영의원이 방명록에 서명을 끝냈다. 그러자 곧바로 검정 행진을 하듯이 기념식장으로 걸어갔다. 양복을 갖춰 입고 나온 지지자들과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아 많이 해본 가락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경험 난 처음이야.’ 속으로 혼자 말을 했다.



유족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품성이 착하고 반듯한 신사라는 말 밖에는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요 얼마 전에 선거에 떨어진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짝 웃으며 서로 포옹을 하는 모습은 청명한 날씨만큼이나 밝고 넉넉해 보였다. 한 걸음 바짝 다가서니 묘역은 드넓었으며 유족 들 중에는 유독 어머니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살림만 알던 어머니들이었다. 시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낙들이었다. 때 되면 밥 지어놓고 가족들 기다리며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던 어머니들이었다. 그러나 내 고향에, 우리 도시에 탱크부대가 진입했다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시절이 하 수상하여 귀가가 늦은 내 자식, 내 남편, 내 딸을 기다리며 대문 쪽을 향한 눈망울은 공포에 질리고 콩닥거리는 가슴은 자자들지 않았다. 아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총에 맞고 칼에 찔려 쓸어졌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제야 시체나마 건지려고 단 걸음에 내달려가 통곡을 터뜨린다. 단장의 아픔을 맛보며 순식간에 눈물의 여인들이 되었다. 
                     
산자는 먼저 가고, 지상에 홀로 남은 사람들은 뒤처리를 도맡게 되었다. 공포에 전율하며 한을 삭이고 통곡으로 항변하는 몫을 감당해야 했다. 그런 분들이 우리 어머니들이 아니더란 말인가. 이런 이유로 5.18 행사장에는 하얀 소복을 차려입고 목에는 검은 수건을 두르고 가슴엔 당국에서 준 리본 하나씩 달고 하나 같이 장승처럼 목석처럼 조용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기념사가 낭독되고, 추모시가 낭송됐다. 강운태 시장을 비롯한 시정 책임자들이 헌화를 하고 참석자들과 유족들이 고인들에게 헌화를 했다. 그리고 묘역으로 이동하여 5.18 영령들이 잠든 곳으로 다가가 그날의 듯을 새기며 예를 표하고 정신을 기렸다. 독재에 항거하고 불의에 맞선 5.18을 그렇게 나마 기억하며 그날의 함성을 불러내어 동참하는 분위기에 마음을 맡겼다.

이어서 구 묘역으로 이동을 했다. 정부가 조성해 놓은 신묘는 정권의 감시와 간섭이 시작되고 유형무형의 통제가 가해지고 있었다. 여론 무마용으로 얼굴을 내비치는 공작자가 있는가 하면, 표를 구걸하기 위해 눈 가리고 야옹하며 찾는 정치 모리배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5.18 유족들의 단결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일방적인 지시사항이 날벼락 떨어지듯이 떨어지고 있다. 30년 넘게 부르던 ‘님을 위한 행진곡’을 뜬금없이 금지한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민주시민의 저항의식과 비판 정신을 갈아엎으려고 혈안이 된 탓이다. 30년 넘게 밥을 먹던 사람에게 갑자기 밀가루로 주식을 삼으라는 억지를 쓰는 격이다. 이에 저항하는 사람도 만만찮다. 신 묘역으로 이장하지 않고 예전의 구 묘역에 그대로 안치하는 사람이 그래서 생겼다고 한다.

정동영의원은 5.18 당시에 광주 현장으로 달려간 기자라고 한다. 그날의 함성을 전하던 젊은 기자가 오늘은 정치인이 되어 망월동에 섰다.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일행을 선도하며 신 묘역에서처럼 같은 정성과 예를 표했다. ‘구망월 3묘역’에는 혁명시인 김남주씨와 강경대 열사를 위시해서 추모 1주기가 되는 정광훈씨 묘가 있었다. 정광훈씨는 20여 년간 농민운동을 하던 사람으로서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의 신분으로 지난 해 사망한 분이라고 했다. 4.27 보선 지원 유세차 나섰다가 교통사고로 운명한 농민 활동가였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는가. 역사는 아이러니 그 자체인가. 지지자들 앞에서 웃음을 보이던 그가 시종일관 침통한 자세로 일관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입을 열었다. 5.18에 대한 그의 소망이라며 한 마디 했다. 하루속히 광주의 망월동과 서울의 광화문에서 5.18을 기리는 추모제가 축제처럼 한날한시에 열리기를 소망한다는 희망을 말했다. 광주에 대한 그의 생각은 더 당당히, 더 진솔하게 서울에서 광주에서 부산에서 뜨겁게 열려야 한다는 것이다.
 
구 망월 묘역 참배가 끝났다. 버스로 향하는 참배객들의 발길이 빨라졌다. 그러나 정동영 의원의 걸음이 왠지 느리다. 뒤돌아보니 묘역의 안내 석 옆을 떠나지 않고 거기서 그냥 머물러 있었다.


다가가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광주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시각은 무엇입니까? 마음에 담아 둔 말씀이 있으시면 한 마디 해주시지요!”
“우리나라가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뤘으니까 자유, 평화, 정의, 상생이 구현돼야 해요. 말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누려야 한다는 얘깁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5.18도 광주에서 건 서울에서 건 전국 어디서나 축제처럼 마음껏 누리는 기념식이 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조금 전 사람들 앞에서 말한 바로 그 대목이었다. 사회가 불안하고, 정치가 시끄럽다 보니 나아가서는 나라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다 보니 만감이 교차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일반인도 국가 사회를 걱정하는데 집권당의 대선후보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정동영, 그가 꿈꾸는 자유, 평화, 정의, 상생은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아무쪼록 그의 발걸음이 국운 융성으로 이어지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들꽃처럼 만발하며,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나는 세상을 위한 값진 행보가 됐으면 한다.

무관(無冠)이 된 한 유명정치인과 생애 처음으로 5.18 광주를 다녀오다.
동행하여 그를 엿보다.

박정례 / 르포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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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로니 2012/05/28 [09:45] 수정 | 삭제
  • 저도 5.18 광주를 한 번도 안 가봤어요다이나믹 5월도 이제 곧 지나가네요.내년엔 5.18에 갈 수 있을지...꼭 한 번 가도록 기회를 만들어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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