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5.18을 통하여 정동영 그를 엿보다처음 가는 5.18 광주를 정동영의원 지지자들과 함께-5.17일 날 광주에 갔다. 한 경제연구소에 발을 담그고 있었던 지라 세미나 차 서너 번 간곳이었다. 하지만 5.18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망월동에 참배를 간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구체적인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 한 혼자 가기란 그리도 용의치 않은 현실이었다. 마음 한 구석에는 늘 5.18 영령들에게 빚을 진 사람마냥 부채의식을 떨치지 못하던 터였다. 벌써 32년째를 맞는 기념식이 아닌가? 5.18 기념식 간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이 더 적극적이었다. 열 일 제치고 갈 테니 광주에 갈 수 있도록 주선해 달란다. 생각만 하다가 날 샐 뻔 했다. 그러나 옆에서 서두르는 사람이 있어서 2인 회비를 지체 없이 입금시켰다. 출발 시간은 덕수궁 앞 대한문에서 6시라 했다. 시간 맞춰가려면 택시 아니면 자가용으로 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첫차가 5:30분인 전철로는 출발시간에 맞게 도착할 계산이 안 나왔다. 결국 아들이 나서서 출발장소까지 데려다 줬다. “앞차에는 우리가 먹은 김밥이 없었나? 아니면 여기서 또 드시는 건가?” “정의원님은 주무시느라 앞차에서는 아무 것도 안 드셨대요.” 하고 뒤에서 말해줬다. “아~ 그렇구나!” 정의원님의 밥 먹는 모습, 전에도 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은 밥상에 놓인 반찬을 무척이나 골고루 맛보는 모습과 서두르지 않고 꼭꼭 씹어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팔도 음식들, 저 양반을 보면 무척이나 반기겠네.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어줘서!" 오늘도 보니 여전히 차분한 모습으로 김밥에 이어 떡 한 덩이를 들고 꼭꼭 씹어 먹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망월동에 도착하자 정동영 의원을 반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는 추세였다. 망월동 유족회장도 뛰어나와 반기며 기념식장으로 안내를 한다. 하얀 장갑을 받아 쥐고서 정동영의원이 방명록에 서명을 끝냈다. 그러자 곧바로 검정 행진을 하듯이 기념식장으로 걸어갔다. 양복을 갖춰 입고 나온 지지자들과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아 많이 해본 가락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경험 난 처음이야.’ 속으로 혼자 말을 했다. 유족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품성이 착하고 반듯한 신사라는 말 밖에는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요 얼마 전에 선거에 떨어진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짝 웃으며 서로 포옹을 하는 모습은 청명한 날씨만큼이나 밝고 넉넉해 보였다. 한 걸음 바짝 다가서니 묘역은 드넓었으며 유족 들 중에는 유독 어머니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살림만 알던 어머니들이었다. 시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낙들이었다. 때 되면 밥 지어놓고 가족들 기다리며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던 어머니들이었다. 그러나 내 고향에, 우리 도시에 탱크부대가 진입했다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시절이 하 수상하여 귀가가 늦은 내 자식, 내 남편, 내 딸을 기다리며 대문 쪽을 향한 눈망울은 공포에 질리고 콩닥거리는 가슴은 자자들지 않았다. 아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총에 맞고 칼에 찔려 쓸어졌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제야 시체나마 건지려고 단 걸음에 내달려가 통곡을 터뜨린다. 단장의 아픔을 맛보며 순식간에 눈물의 여인들이 되었다. 산자는 먼저 가고, 지상에 홀로 남은 사람들은 뒤처리를 도맡게 되었다. 공포에 전율하며 한을 삭이고 통곡으로 항변하는 몫을 감당해야 했다. 그런 분들이 우리 어머니들이 아니더란 말인가. 이런 이유로 5.18 행사장에는 하얀 소복을 차려입고 목에는 검은 수건을 두르고 가슴엔 당국에서 준 리본 하나씩 달고 하나 같이 장승처럼 목석처럼 조용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이어서 구 묘역으로 이동을 했다. 정부가 조성해 놓은 신묘는 정권의 감시와 간섭이 시작되고 유형무형의 통제가 가해지고 있었다. 여론 무마용으로 얼굴을 내비치는 공작자가 있는가 하면, 표를 구걸하기 위해 눈 가리고 야옹하며 찾는 정치 모리배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5.18 유족들의 단결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일방적인 지시사항이 날벼락 떨어지듯이 떨어지고 있다. 30년 넘게 부르던 ‘님을 위한 행진곡’을 뜬금없이 금지한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정동영의원은 5.18 당시에 광주 현장으로 달려간 기자라고 한다. 그날의 함성을 전하던 젊은 기자가 오늘은 정치인이 되어 망월동에 섰다.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일행을 선도하며 신 묘역에서처럼 같은 정성과 예를 표했다. ‘구망월 3묘역’에는 혁명시인 김남주씨와 강경대 열사를 위시해서 추모 1주기가 되는 정광훈씨 묘가 있었다. 정광훈씨는 20여 년간 농민운동을 하던 사람으로서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의 신분으로 지난 해 사망한 분이라고 했다. 4.27 보선 지원 유세차 나섰다가 교통사고로 운명한 농민 활동가였다. 구 망월 묘역 참배가 끝났다. 버스로 향하는 참배객들의 발길이 빨라졌다. 그러나 정동영 의원의 걸음이 왠지 느리다. 뒤돌아보니 묘역의 안내 석 옆을 떠나지 않고 거기서 그냥 머물러 있었다. “선생님, 광주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시각은 무엇입니까? 마음에 담아 둔 말씀이 있으시면 한 마디 해주시지요!” “우리나라가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뤘으니까 자유, 평화, 정의, 상생이 구현돼야 해요. 말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누려야 한다는 얘깁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5.18도 광주에서 건 서울에서 건 전국 어디서나 축제처럼 마음껏 누리는 기념식이 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조금 전 사람들 앞에서 말한 바로 그 대목이었다. 사회가 불안하고, 정치가 시끄럽다 보니 나아가서는 나라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다 보니 만감이 교차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일반인도 국가 사회를 걱정하는데 집권당의 대선후보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정동영, 그가 꿈꾸는 자유, 평화, 정의, 상생은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아무쪼록 그의 발걸음이 국운 융성으로 이어지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들꽃처럼 만발하며,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나는 세상을 위한 값진 행보가 됐으면 한다. 무관(無冠)이 된 한 유명정치인과 생애 처음으로 5.18 광주를 다녀오다. 동행하여 그를 엿보다. 박정례 / 르포작가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국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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