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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상징조작에 대하여

최현순 | 기사입력 2019/01/24 [13:10]

신화와 상징조작에 대하여

최현순 | 입력 : 2019/01/24 [13:10]
중국 고전소설 ‘초한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여기서 나중에 한나라를 세워 전한의 초대 황제가 되는 유방이 사상(泗上)의 정장(亭長 : 지금의 동네 이장급)으로 있을 때, 진나라 황제(진시황)의 명으로 동네 장정들을 이끌고 여산릉 조성작업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때 중간에 이탈하여 무리를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갈 때 하루는 뱀 한 마리를 베게 되었는데, 그러고나서 얼마후 웬 노파가 나타나 “뱀은 내 아들로 백제(白帝)의 아들인데 적제(赤帝)의 자손이 나타나 죽여버렸다”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지더라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 한 고조 유방

물론 오늘날 이런 이야기를 사실일것이라 믿는 사람은 없다. 특히 오늘날 중국학계는 이 일화 자체가 유방일파가 꾸며낸 일종의 ‘상징조작’ 가능성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당시 중국 진나라의 법도는 황명으로 벌이는 노역장에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하면 사형을 당하게 되어있는터. 이런 상황에서 이 노역작업에서 이탈하자는 유방을 무리들이 자신을 확실하게 믿고 따르게 만들기 위하여 이러한 상황을 사전에 ‘연출’해 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상징조작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만은 추정의 의견이 다소 엇갈려 (1) 애초 없었던 일을 유방의 측근들이 꾸며냈다거나 (2) 아니면 뱀도 노파도 애초부터 유방의 측근들이 미리 준비해놓고 꾸민일이라는 정도의 설이 나뉘어져 있는 정도다. 눈길가는 것은 사실 이와같은 ‘상징조작’을 유방일파보다 앞서 반란을 일으킨 그래서 중국역사상 최초의 ‘민중반란’으로 기록되어있는 ‘진승-오광의 난’의 당사자인 진승-오광도 이런 ‘상징조작’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 내막은 애초에 진승과 오광이 일을 꾸미면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특별한 존재로 보이게 만들 필요가 있다(그래에 봉기에 가담한 이들이 확실하게 자신들을 믿고 따를테니까)’고 간하여 처음엔 진승이 왕이 된다는 의미로 ‘진승왕(陳勝王)’이란 글자를 붉은 글씨로 새긴 비단을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어 잡히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그러한 글자가 발견되게 만들고 한술 더 떠 그 다음엔 오광이 여우로 분장하여 한밤중에 산속으로 들어가 역시 ‘초나라가 크게 흥하고 진승이 왕이 될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여우 울음소리처럼 내게 했다는 것이다.

진승-오광 역시 반란을 일으키면서 동참한 무리들이 확실하게 자신들을 믿고 따르게 만들기 위해 이런일을 꾸민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헌데 흥미로운 것은 사마천이 지은 사서 사기(史記)에 기록되어있는 저와같은 사건들의 서술방식이다. 일단 진승-오광의 일 같은 경우 사마천은 애초에 그것이 바로 진승-오광이 자신들이 귀신으로 보이게 하기위해(특별한 존재로 보이게 하기위해) 꾸며낸 일이라 적고 있으면서 반면 저 유명한 유방의 흰뱀과 관련된 일화는 마치 실제 있었던 일인양 서술하고 있다. 어쩌면 역사가 ‘승자의 기록’임을 짐작케 하는 한 장면이라고나 할까.

만약 유방이 황제가 되고 진승-오광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고 반대로 유방이 천하를 잡는데 실패하고 진승-오광의 반란이 성공해서 진승이 세운 나라가 흥했다면 이후의 역사서엔 저와같은 상징조작이 어찌 서술되었을까 그 생각을 잠시 해봤다.

실제 역사에는 자신들을 따르는 무리나 백성들이 확실하게 자신들을 믿고 따르는지를 확인하거나 확실하게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 ‘상징조작’을 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보게된다. 사실 고대왕조의 건국신화도 대개 그런식이 아닌가. 가령 우리의 경우도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라든가 신라왕실의 기원인 박혁거세,석탈해,김알지 또는 가야의 김수로왕 신화등도 대개는 사실일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 단군신화



다만 그러한 이야기들의 만들어진 배경은 한번 음미해볼 필요성과 의미는 있다. 그것이 실제 나라를 세우거나 반란을 일으키려한 이들이 꾸며낸 ‘상징조작’인지 아니면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면서 좀더 신비롭게 어떤 상징화되어 만들어진 이야기인지(가령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가 곰과 호랑이의 토템신앙 부족 아니었겠느냐는식의 분석처럼) 그런 것을 분석해보는 것은 어느정도 의미가 있다.

잔다르크 ‘신화’의 경우도 바로 그러한 ‘상징조작’ 가능성이 매우 진지하게 제기되고 있다. 우리가 흔히 프랑스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알고있는 16세 소녀 잔다르크. 헌데 그 잔다르크의 등장 과정도 어디까지가 진실로 믿어야할지 판단하기 힘들정도로 신비로운 이야기 투성이다. 애초 잔다르크가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은자’라며 나타났을 때 샤를7세(원래 왕위계승권자이긴 하지만 전시의 복잡한 상황 때문에 즉위식을 치르지 못함)측은 잔다르크가 정말 ‘신의 계시를 받은자’가 맞는지를 시험해보기위해 일부러 샤를7세를 초라한 복장을 입혀 수많은 대신들과 함께 있게했는데, 잔다르크가 그때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을 샤를7세를 한번에 알아봤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일화로는 하루는 잔다르크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어느 성당의 제단밑을 파면 검(劍)이 나올 것’이라고 해서 실제 그곳을 파보니 녹슨 검 하나가 나오고 바로 신비한 빛을 발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두가지 일화는 과연 정말 있을수 있는 일인지 믿기 힘든일이다. 허나 이 역시 ‘상징조작’을 만들어낸일이었다면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수 있는일이다.

마치 유방의 흰뱀이야기가 사전에 유방 측근들이 꾸며낸 일이라면 가능할수 있는 일이듯이 잔다르크가 그때까지 일면식도 없는 ‘샤를7세’를 수많은 대신,귀족들 사이에서 한눈에 알아보았다던가 또는 계시를 받았다는곳을 파보니 진짜 검이 나왔다는 이야기 역시 미리 예비해 둔 것 좀 속되게 표현하면 ‘짜고치는 고스톱’이었다면 충분히 가능할수 있는 이야기다.

잔다르크의 경우 당시 프랑스가 영국에게 계속 패하며 밀리는 상황이었던데가 샤를7세의 대관식도 제대로 치르지못해 왕권이 불안한 시기였고 게다가 말이좋아 기사(騎士)지 대개는 귀족집안출신들이라 계속되는 연패에 사기가 땅에 떨어져 제대로 싸울생각도 못하던 프랑스군에게 어떤 결기나 의기를 북돋아줄만한 매개체나 동기유발자가 필요했던 상황에서 만들어낸게 잔다르크고 따라서 샤를7세를 한눈에 알아본것도 계시를 받았다는 장소에서 신비로운 검이 나온것도 사전에 다 짜고친 일이었으면 충분히 가능했을것이라는 이야기다.

마치 신라가 백제에 연패할 때 관창의 죽음을 통해 화랑들의 의기를 북돋아주었던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나이어린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도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데 너희들은 뭐냐 ?’, 또는 ‘이렇게 나이어린 소녀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니 너희도 용기를 내서 싸우라’는 식으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군인이라던가 많은 귀족,대신들에게 의기를 북돋아줄만한 매개체가 필요해서 만든게 잔다르크고 그래서 저와같은 ‘상징조작’ 사건들도 만들어냈다는게 그와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신화(神話)에서 상징조작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동기가 대개 그와 같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건국신화나 인물신화가 고대로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미화되거나 과장될 가능성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본다면 나라를 일으키는 세력이나 또는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등 어떤 특정한 세력이 자신들이 매우 특수하거나 신비한 존재임을 민중이나 백성들에게 인식시켜 자신들에 대한 지지와 충성심을 이끌어내기위한 그러기 위해 만들어내는게 그와같은 ‘상징조작’이라는 이야기다.

‘건국의 아버지는 외부에서 온다’는 말이 있는것도 그런 이유다. 자신들이 어느 외부의 강성한 나라나 지역 또는 어떤 신비로운 그 무엇이 있는 지역에서 왔다는식의 주장을 해야만 그래야 한 나라를 세우거나 반란을 일으킨 무리가 자신들이 어떤 천운이나 신탁을 받은 존재로 신비화시켜 그래서 통치나 건국의 정당성을 합리화 시킬수 있는 이야기. 그래서 건국의 시조자는 대개 ‘외부지역 어떤곳에서 왔다’거나 ‘외부의 특정한 나라나 지역에서 핍박을 받다 온 이’라던가 그런식으로 미화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고려태조 왕건의 시조가 중국에서 왔다던가 또는 청나라나 금나라 등 여진족이 만든 나라들이 자신의 시조를 신라에서 왔다고 하는식의 주장도 지나치게 의미를 두거나 그런 부분을 너무 깊이 파고들어 한사코 그 연관성을 주장하려는게 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경우엔 오래전부터 중국을 상국으로 섬기거나 대단한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바로 그런 중국대륙지역에서 온 자손이라고 해야 자신의 조상을 신비화시킬수가 있는것이고 마찬가지로 청이나 금이 자신들의 조상이 신라나 조선과 같다거나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하는식의 주장도 오히려 자신들 왕실의 신성함을 주장하기 위해 만든 ‘상징조작’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여진이나 몽골등 북방의 이민족들이 고려나 조선 혹은 신라를 그렇게 ‘신비하거나 상서로운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그런식의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될수는 있을 것이다.

또 한가지 옛날의 역사서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방식에 대해서도 좀 유념해둘 부분이 있는데 일단 요즘처럼 무슨 방사선 탄소로 연대를 측정하고 유물이나 유적을 직접 확인해보고 그럴수 있는 시절은 아니지 않는가. 대개 과거 역사서를 편찬한 이들은 보통 그 이전부터 전해내려오는 기록들을 취합 이중 믿을만한 기록과 믿기 어려운 기록들을 구분해가며 그런방식으로 역사서를 만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는게 오늘날 학계의 중론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흔히 중국의 눈치를 보거나 사대주의자라서 왜곡을 했다느니 의도적으로 고구려나 백제의 기록을 많이 누락시켰다느니 이런식의 주장이 무리한 주장일 수밖에 없는게 비단 김부식뿐만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편찬하는 이들의 역사편찬 방식이 과거 기록중 믿을만한 기록들을 모아 만드는 방식이었기 떄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가령 백제의 ‘요서경략설’에 대해서도 ‘회의론’이 계속 이는 이유가 그래서다. 근본적으로 백제가 요서,진평을 차지했다는식의 기록이 대개 위진남북조 시절 남조의 기록에만 보이는것들이고, 따라서 근본적으로 남조에서 북조를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었을 가능성 그리고 무엇보다 만약 남조의 역사 편찬자들이 그보다 앞선 사서나 기록의 오류가 있었는데 그 문제를 검증할 기회나 방법이 없었다면 (설사 과거 기록에 오류가 있었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적을 수밖에 없었을것이란 한계도 생각해 봐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 역사기록의 신화적 요소나 믿을수 없는 이야기는 그러한 사정들을 좀 구분하고 염두해 두면서 판단을 해야한다는 이야기다. 특히 신화적 요소나 믿을수 없는 이야기들을 일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은 오늘날에 와서 또다른 오류나 문제를 야기시킬수 있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시조들은 모두 알에서 나왔거나 금궤에서 나왔다고 했지만 ‘이는 황당하고 믿을것이 못되지만 세속에 서로 전하고 전하여 실사(實事)로 화(化)하고 말았다’고 했고, 일연은 삼국유사 서문에서 ‘옛 성인들이 예악(禮樂)을 가지고 나라를 일으키거나 인의(仁義)를 가지고 가르침을 베풀고자 할때면 괴이한 힘이나 지저분한 귀신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나려 할때엔 부명(符命)에 맞는지 도록(圖籙)을 받는다는지 반드시 남과는 다른 것이 나타난 다음 큰 변화를 타고 큰 틀을 잡아 나라를 일으킨다.’며 기이(紀異 : 신비로운 일을 적는다)편에 수록되는 이야기들을 적는 취지를 그와같이 밝혔다.

또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천지개벽의 시작이 이미 군신(君臣)의 비롯이며 도(圖),위(緯)의 기록이므로 그 기록은 믿을수 없다하여 일률적으로 버릴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옛 사서의 편찬자들도 신화적 요소나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사정을 그와같이 밝힌 것이다.

또 산해경(山海經)을 편찬한 곽박(동진 시대의 점술가)은 서문에서 ‘사물은 스스로 괴상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온 후에 괴상해진다. 괴상한 것은 과연 자신에게 있는것이요, 사물이 괴상한 것은 아니다...(중략)...괴이하지 않은 것을 괴이하게 여기는 것은 괴이한 것이 없는것과 거의 같고, 괴이한 것을 괴이하지 않게 여기는 것은 처음부터 괴이한 것이 있지 않은 것이다’ 라고하여 예부터 내려오는 전설이나 기이한 이야기들을 굳이 엮어서 ‘산해경’이란 책으로 편찬하는 취지를 이와같이 밝히기도 했다.

옛 사서(史書)나 서책(書冊)에 기록된 신비하거나 기이한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일지 하는 문제를 논하기 위해 이런글을 써 봤다. 옛 사서나 서책에 쓰여진 신화적 요소들을 무작정 허무맹랑하다고 부정,부인만 하는것도 반드시 합리적이라 볼수는 없지만 그런 신화적이고 신비적인 이야기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확대 해석하는것도 분명 문제고 경계해야할 일들이다.

특히 그러한 신화적 요소나 신비적 이야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확대해석이 오늘날에 와서 또다른 문제나 오류를 만들 우려가 있기에 하는 이야기다. 유사(類似)한 역사(歷史)나 종교(宗敎)에 혼동(混同)을 일으키는 이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참고문헌 : 1. 유사역사학 비판 (이문영.역사비평사.2018) 2. 한국 고대사 연구 (이병도.박영사.1976) 3. 한국사신론 (이기백.일조각.1999) 4. 역사학의 역사 (한영우.지식산업사.2002) 5. 신체계 한국사 (고시학회.정제우,강정식 공저.1976) (* 1970년대 행정고시,승진,유학등 각종 고사,고시 대비 문제은행형 교재) 6. 엽기 세계사 (이성주.추수밭.2007) *

▲ 김기백 민족신문 대표



아울러 이글은 현재 고인이 되신 고 김기백 민족신문 대표님께 바치는 글임을 밝힙니다. 원래 김기백 선생 생전에 완성을 보려한 글인데 공사다망한 몸이라 뒤늦게 세상에 발표합니다. 김기백 선생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이 글을 투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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